오오, 잘 익은 과일

부르다

by 박경이

헉! 제습기 물통에 가득한 물을 보고 기절초풍했다. 물 분자를 불러 모아 2리터 통을 채운 건가, 그게 가능한가, 정말 H2O를 모았단 말이야? 이런 도구를 만들다니, 진정 내게 ‘쓸모’ 있다. 비행기보다 더 놀라운 기계다. 진작에 살걸, 나는 기술과 너무 멀어서 어리석고 답답할 만큼 누리지 못하고 살았으니 새삼 분하다. 필요와 가능성을 불러 모아 연구하고 생각하고 만들어내는 인간들, 아름답도다. 덕분에 산다, 고마울지라. 나는 무얼 불러 모으고 있을까. 느닷없는 번갯불에 눈앞이 환하다.


무럭무럭 맹렬하고 활발한 풀의 전성기, 관심을 주든 말든 하늘 향해 노래하며 생긴 대로 자란다. 힘찬 전진과 거침없는 당당함이 보는 사람의 힘을 불러일으킨다. 명자나무 아래 잔디 닮은 풀은 은은한 향기가 넘실댄다. 낮으나 제 목소리 가진 풀을 뽑아버릴 수 없다. 여리지만 파랗게 주장하는 팽팽한 몸짓을 외면하지 못한다. 그래 네 향기를 모으며 살아 보아라, 늙어 보아라, 이미 네 자리다.

줄기마다 수액 흘러 엉긴 자리가 맘 아프던 자두나무는 아직 생채기를 달고 있다. 옴닥옴닥 탐스럽던 연두 어린 하얀 꽃이 일시에 지고, 사랑스레 맺히던 열매마다 후두둑 떨어져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그것. 지난 봄에 미화가 살피더니 자두나무라는 거다. 내가 ‘이상하게 생긴 배’ 같다고 했던 열매가 자두였다. 미안해, 자두나무야, 나는 말했다. 두 번 봄을 보내고서야 이름을 불렀구나. 앞으로는 너임을 알고 지켜보마. 네게 필요한 생명을 불러 모으며 네 이름으로 살아 보아라,고 말해 주었더랬다.

나는 내가 만난 수많은 아이들이 제 이름으로 살게 도왔던가.

그 이름과 향기에 마땅한 무게로 불러 주었던가.


반성문 쓰는 마음으로 아직 생채기 선연한 자두나무 옆에 서있는데 나를 부르는 혜경이 목소리가 들렸다. 함박웃음 지으며 들어서는 부부, 반갑고 반가워라. 혜경은 해물탕거리를 손질해 왔고 남편은 시다모를 볶아 왔다. 두 번이나 내려줘서 흡족하게 마셨다. 바리스타 과정 떼고 피아노도 배운다니 곧 서른 살 넘은 우리집 피아노 뚜껑 열릴 날 올지도 모르겠다. 밝고도 속깊은 진짜배기 짝꿍. 서울 직장 마다하고 제주도 남들보다 먼저 내려갈 때 알아봤지. 바람을 품고 바다와 함께 자족하는 인간.


무단외출에 벌 받던 여고시절 이야기로 우리는

한없이 깔깔대며 고추 따고 고춧잎도 훑었지.

노각 한 개, 애호박도 한 개, 선물이 절로 마련되었다.

혜경아, 어쩌면 그리 변함없이 평온하고 욕심없이 넉넉하냐.

너희는 뭘 불러 모으고 있기에 그렇다니?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려줄게.

멋진 이름에 세련된 기품, 안아주는 음악이지?

너희도 그렇게 늙으려나 봐.

오오, 흙과 바람 속에서 잘 익은 과일.


이전 27화아이 여섯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