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는 파랗게 질려서 죽어요
1
유끼짱이 시내버스 타고 동네길 살랑살랑 걸어 우리집에 왔던 그 봄날 아침, 남편이 뒷산에서 꺾어온 진달래는 참으로 온전히 예뻤다. 나비처럼 날개를 펼친 꽃송이들은 발레리나 같더라. 엷은 분홍 꽃잎들이 겹쳐 진분홍으로 웃으며 춤추던. 늠름한 봉오리들, 아른아른 동색의 어울림, 날렵한 군무. 이렇게 활짝 핀 것은 처음이라고, 이런 걸 ‘활~짝’이라고 하는 것인가 거듭 놀라며 보고 또 보았더랬다.
이리 호들갑스레 진달래를 느껴보긴 처음이에요,라고 내가 말을 끝냈을 때 유끼짱이 말했다.
진달래는 파랗게 질려서 죽어요.
으응? 그러네요,하고 대답했지만 그의 표현과 생각을 부인하지 않는 태도였을 뿐 동의나 공감은 아니었다. 무서운 느낌으로 먼저 왔다. 은연중 서러움을 깔며 거리감을 두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말이었다. 생뚱맞은 남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따끔따끔 떠올랐다. 진달래는 파랗게 질려서 죽어요. 며칠 진달래를 지켜보았다. 분홍과 보라 사이, 푸른 색감의 변화가 오히려 한 층 아름다운데. 파랗게 질려서 죽는다고 표현하다니... 시들 때 푸른 기운이 무겁게 돌기는 하지. 사르르 말리고 꼬이면서 파랗게 멍든다고 할 수는 있겠다. 그래, 동백꽃처럼 말이다. 나무도 듬직하려니와 낱낱 잎사귀도 도탑고 미더운 동백나무. 그러나 겹겹이 붉게 감싼 농염한 꽃이파리 송이송이 활짝 핀 나무는 보기 드물었다. 더러 피면서 처연히 멍들고 시든 봉오리 단 채 떨고 있을 때가 많았다. 간절한 봄볕 사랑에 취하여 남 먼저 피었으나 변덕스런 봄 기온에 속절없이 다치는가. 피자마자 얼어죽는 꽃...
그래 유끼짱의 말이 맞다. 내게 진달래는 한반도의 무수한 전쟁과 항쟁에서 피흘린 혼령들의 상징이자 피어나는 봄과 삶을 뒤흔들며 살아보고 싶게 만드는 동력, 힘찬 아름다움 자체였다. 내가 진달래 안에서 수십 년 박제된 생생한 삶을 발견하며 놀랄 때 그는 시퍼런 죽음 하나를 제대로 꺼내 보인 셈이다. 명백한 생의 이면을 말이다. 진달래, 느닷없이 발레리나의 꼬부라진 발가락도 보이고 물아래 분주한 백조의 아우성도 보이던 봄날이었다. 내 안에서 살아나온 뜨끔한 진실이기도 했다.
2
햇살이 깨알처럼 구르는 가을날, 터미널로 유끼짱 마중을 나간다. 시내버스 탈 터이니 저번처럼 동넷길이나 살살 내려오시라는데 내가 얼른 보고 싶어 안 되겠다. ‘파랗게 질려 죽'을 듯 까닭 없이 마음이 급하다. 낚아채듯 태우고 집에 오니 네 가지 콩·은행·현미·찹쌀밥이 냄새도 좋이 뜸 들고 있다.
굴·새우·부추전 부쳐서 그녀를 먹였다. 빙그레 웃으며 야금야금 솔솔 아주 천천히 접시를 비운다. 된장국 한 사발, 고추.양파.깻잎 장아찌에 부추김치도 복스러이 잘 먹는다. 남의 손이 오래 간절했던 사람. 혼자 남매를 키우면서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 활짝 웃기 때문에 더욱 남의 손이 필요한 사람이다.
자, 이제 유끼짱을 위한 특급 커피를 내려야지. 때맞춰 진숙이가 보내온 블루보틀, 개장하는 가게 앞에서 세 시간을 줄서서 샀다는 커피다. 돌돌돌 칼날이 무딘 우리집 핸드밀, 거칠면서도 너그럽게 돌아가는 칼날 속에 향기는 더 진하게 전해온다. 10년 손때 나눈 사랑을 계속하고 싶어서 새 핸드밀을 사고도 묵히는 중이라고 말하면서 커피를 간다.
전동기는 몇 번 쓰다가 일찍이 그만 두었어요. 커피도 아프고 나도 아픈 것 같아서요. ㅎㅎ사실은, 매끌거리는 원통을 두 손으로 번갈아 잘 잡고 쉬어가면서 돌리는 재미를 그만 둘 수가 없어요. 내 손 안에 꼭 맞아서 잡으면 놓고 싶지 않아요. 힘들다고 버릇처럼 투덜거리면서요. 나랑 하나 되어 착 달라붙는 느낌이 너무 좋아요. 돌돌돌 소리 따라 콩이 살살 부서지는 느낌이 전해질 때 너무 좋아요. 코끝에 향기가 오르면 취하여 놓고 싶지 않아요. 엄청난 사랑이죠. 엄마가 아이를, 특히 아들을 놓아주지 못하듯이 말이에요. 어쩌겠어요, 놔주고 밀어보내야 하는데 계속 품에 두고 싶으니.
그러게요, 알아듣겠어요, 선생님, 호호홋, 저도 실천하게 될 거예요, 아직은 봐주세요.
3
아들을 너무 사랑한 여인들을 애도하는 방향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나아갔다. 남편의 자리에 아들을 놓고 섬기거나 너무 많이 사랑할 때, 내 욕망의 대체물인 줄 모르고 진실로 사랑하였으나 너무 사랑하여 잘못 사랑한 나머지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아이가 거짓자기로 살게 되는 수도 많음을, 우리는 눈물방울 한 개씩 진주처럼 달고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평생 나를 지배한 법률이었다’,고 롤랑 바르트는 말했다. ‘이제 그 무엇도 나를 촉발케 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어머니 사후에 그리 썼다. ‘나는 그녀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동시에 죽지 못했다.’고 했다. 아들을 낳은 다음 해에 남편을 잃은 바르트의 어머니 앙리에트 벵제는 여든네 살, 1977년에 세상을 떠난다. 80년에 트럭에 치인 바르트는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심리적으로 치료를 거부한 거나 다름없었단다. 그는 한 달 뒤에 사망한다.
어머니는 아들의 소우주 그 창조를 명령한 다음 물러나야 한다. 자신의 기둥을 만들고 법을 세우도록 돕되 아이 스스로 다스리게 두어야 한다. 다스리는 기쁨은 아이의 것이어야 한다. 엄마가 삼키는 기쁨이 아니라 아이가 누리는 기쁨이어야 한다. 엄마에게 준 기쁨의 반사를 먹으며 아들이 그 빛에 그을려서는 안 된다. 종종 딸에 대한 비가시적 착취는 유린이 되기조차 한다. 폭식하는 엄마를 먹이려 올올이 뽑고 방울방울 짜는 기쁨은 영혼을 소진시키는 고통일 뿐.
인생의 '새벽'부터 엄마에게 자신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로맹가리도 어머니 사후 자살했다. 아들과 어머니, 하나인 듯 사랑하면서도 둘로 살기의 어려움이여. 아이가 가진 것을 스스로 드러내고 피워내도록 어머니의 욕망을 전달한 다음 그 사랑은 쉬어야 한다. 엄마가 아들을 위해서 살면 안되듯이 아들도 엄마를 위해서 살아서는 안된다. 누구를 위한다는 삶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참말이라고 거짓말하지 않으면 나오는 답이다.
그러나 단지 지금을 쫒기듯 살아가는 보통 엄마들이 사랑이 지나친지 부족한지 쉬 알겠는가. 누군가 좋다고 말하는 갖은 방법에 맞추고 흉내내며 명령 같은 권유를 따르고 좇아가기도 벅차다. 줘도 부족한 듯 한없이 주고 싶은 게 사랑이며 못 줘서 미안할 뿐인 걸. 그래서 상상력과 성찰이 필요한 게 아닐까. 퍼붓는 사랑의 대상이 진짜 내 아들인지 엄마 자신인지, 독이 되는 사랑은 아닌지. 사랑의 춤을 같이 즐기는지 혼자 도취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니 속절없이 흘러가는 ‘지금’이 부모에겐 두렵다.
그래서 인간이 시간을 하루씩 끊어내고 한 시간씩 잘라 쉼표를 만드는 게 아닌가 싶다. 멈추고 쉬며 생각하라. 아이의 생명력이 지금 엄마의 작은 기쁨을 위해 소모되지 않도록 사랑도 쉬어야 한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 하늘님도 쉬셨다. 일요일에 몇 배 더하는 엄마의 사랑이 아니기를. 엄마, 버거워요, 이제 그만 사랑해요.라고 말할 때는 이미 늦는 경우가 많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도움을 청하며 보내는 무수한 신호를 놓치는 일이 바로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어쩌나, 어쩔까나. 진정 아이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강렬할수록 멈추고 돌아보아야 한다. 자신의 사랑을 의심해야 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아이가 멍들어서는 안된다. 사랑에 질려...서는 안된다, 피어야지. 피어라, 활짝.
4
난데없는 피곤이 덮친 하루였다. 어쨌거나 유끼짱이 기뻐해서 나는 기뻤다. 남의 덕에 내가 살았듯이 나도 누군가의 덕이 되었기를. 그가 디딤돌이라고 믿었던 나와 내 말이 혹시 걸림돌이다 싶어도 그건 잠깐일 것이다. 어느새 디딤돌로 변해있을 걸림돌일 터이다. 눈물 씀벅이다 보면 줄줄이 징검다리가 되어 그가 맘껏 딛게 될 테다. 내가 던진 돌멩이를 발판이자 도움닫기로 그는 스스로 만들 것이다. 우리 서로의 눈에 씌운 까풀이 아직 튼튼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