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또 자라요

아비들 또한 품었던 하늘

by 박경이


이사 후 처음 맞은 봄 어느 하루, 아랫집 아주머니가 두릅을 따 먹으라고 부르신다. 이것 봐요, 하며 똑똑 따서 손바닥에 놓아주신다. 깜.놀! 나무는 낯설지만 손에 놓인 것이 두릅인 건 알았다. 며느리도 모르게 따온다는 두릅나무가 우리 울안에 있다니, 신통방통. 가시가 굵어서 맨손으로 어렵다, 요거 까칠하네.


여보~ 우리집에 두릅나무 있어, 이것 봐~~ 연못가에 있어, 이 색깔 좀 봐, 아주머니가 따주셨어. 어쩌면 보드랍고도 요리 통통하냐. 그런데 두릅나무 뻐쩡하니 못생겼어. 여보, 자기 두릅나무 알아? 그냥 꽂아 놓은 막대기야. 가시 숭숭 박힌 나무기둥. 호두나무도 멋없게 생겼더만. 그러니 맛있고 영양이 많은 거야, 다 빼준 어미 몸 아니겠나. 여보, 두릅 정말 잘 데쳤지. 이 곱디고운 초록연두 좀 봐. 있는 색을 끌어내고 입힐 색을 더했잖아. 노란 접시에 담으니 더 예쁘다. 못 먹겠네, 그냥 봐야겠어.


그 뒤로 두릅을 잊고 지나간 봄도 있지만 알뜰히 따고 나누기도 했으니 봄날의 큰 즐거움이었다. 한편 4월 초순, 자라는 두릅을 따 먹는 사이에 우리집 서쪽 옹벽위에 목련이 핀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가 갈수록 잘 자라 많은 꽃을 피우며 4월을 기다리게 하더니 올해는 완전 제대로 피었다. 지난해는 봉오리 살짝 벌어 오늘내일 하는 사이 써늘한 냉기가 달려와 피는 듯 누렇게 시들며 떨어져 버렸으니 그건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낱낱이 갈색으로 말린 채 툭툭 후두둑 흘러내리는, 천 개 봉오리의 무력한 낙하! 올 봄, 고귀한 목련이 도톰한 흰색의 깊이를 뿜으며 겹으로 피어나고 있다. 길어야 일주일, 그 유한성을 아는 설렘으로 눈은 더 시리다. 언제 잘렸던가 싶게 잘 자란 단풍나무들도 목련 뒤로 한 겹 배경을 더한다. 가을이면 목련의 자랑을 이어받을 터이다.


전기톱 소리에 기겁을 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던 날, 단풍나무들이 쓰러져 누워 있었다.

“단풍나무를... 자르시나요?”

나무둥치 하나 똑, 떨어지자 천천히 손을 멈춘 노인이 고개를 들면서 목례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어리둥절 한다.

“지난 가을에 단풍나무 정말 예뻤는데요...”

“...?”

“봄에 목련 예쁘고...”

“금~방 또 자라요~.”


금방? 그의 얼굴에서 내가 본 것은 분명 가느다란 미소였다. 전기톱은 곧 다시 작동되었다. 싹싹 자르는구만, 뭐가 금방 자란다는 거야. 내 시간과 빛깔이 곱으로 사라진 것만 같았다. 아깝다, 내 땅은 아니지만 풍경은 내것이었는데. 세상 하나가 지워졌구나,하며 지난 가을의 단풍빛과 자태를 떠올리려 했으나 이미 기억은 충격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간 뒤였다. 저녁에 보니 단풍나무 몇 그루가 남겨져 있었다. 노인의 웅숭깊음일까, 그에게 팔랑팔랑 날아간 나의 애탐인가.


그 이듬해 봄, 잘린 단풍나무 밑동에서 돋아나는 잎싹, 노랑 갈색 연두의 꼬꼬마 우산들을 보았다. 너무 예쁘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가슴이 아려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밑동마다 찾아가며 보고 또 봐도 더 보고 싶었다. 펴다 만 우산 같은 꼬마 잎사귀는 아직 못 뜬 갓난아기 눈이라고 해도 좋았다. 통통한 새의 발자국 같이 귀여운 것, 사랑스러워라 내 아가. 환영환영, 그래 금방일 거야. 그분이 금방이랬어. 금방이든 아니든 커 나갈 터이니, 환영환영, 나는 중국사람처럼 두 번씩 말했다. 이제 시간은 더욱 주관적이 되겠구나. 시간은 감정이다, 내가 찾아 여닫는 문들의 연결이다.


노인의 압축된 감정 시간에서는 더 금방이겠지. 그 역시 두릅처럼 호두처럼, 어미들처럼 다 빼준 아비일 터이니 알았겠지. 그래서 한 말씀이겠지. 그리고 나 또한 ‘금방’을 더러 보았고 제법 살았다, 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던 것이다. 단풍나무들은 자랄 것이고 나는 시간을 늘릴 것이다. 금방은 거듭되며 하나의 끝이 될 터이다. 내가 나를 만들며 흐르고 거스르는 삶도 더디거나나 금방이거나 어쨌든 충분하다는 것을 노인은 진짜로 안다. 금방,은 계속 되고 함께 흐를 터이다. 그 흐름은 다른 누군가에게 또 얼마나 금방일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그 때는 있는 줄도 몰랐던 목련이 이렇게 저희들 마을을 이뤘고, 밑둥만 남은 단풍나무가 쿵쿵 뛰는 토토로의 마당에서처럼 금방 자랐던 거다. 목련은 더디 펴도 금방 피었으며 또 금방 졌다. 이제 단풍이 불탈 거다, 금방이다.


年年世世 보고 또 본 중에 가장 상쾌하고 고운 볕이며 바람이다.

빨랫줄에 널린 옷들을 통과하는 볕살들이 어디로 가나 본다.

이불과 요도 한낮 내내 늘어져 잔다.

조것들이 품은 하늘은 결국 내꺼다.

무수한 어미와 아비들 또한 품었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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