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와 똥배짱

똑똑한 아이들이 자란다

by 박경이


국화가 한창인 늦가을, 노랑과 보라색 국화의 두터운 친밀감을 넘어 연한 갈색 국화가 가만히 눈길을 끈다. 토대거나 배경으로 인식되는 흙색, 황토색 계열의 노랑을 품은 꽃이 낯설더니 해 지나며 볼수록 새롭다. 배경인 동시에 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완성시키니 멋스럽다. 기다란 가지를 흔들어 마음을 멀리까지 밀어주니 아름답다. 고이 마른 꽃대들도 국화의 배경이 되어준다. 다음 해로 전하기 위해 베거나 뽑아주어야 할 생명의 흔적들이다. 제 이름을 들이밀지 못하는 풀들도 잘 말라가며 그것들대로 손길을 기다린다. 바람 따라 소복이 몰려 있는 낙엽들도 손을 기다리는 다른 손, 손들이다.


단련되려면 멀었는지 손가락마다 또 물집이 생겼다. 낫을 좀 써 볼까, 가만히 들다가 무서워서 얼른 도로 걸어놓는다. 난 아직 가위 수준, 시골집에서 세 번째 가을을 넘기는 중이다. 적응을 넘어 수용에 이르고 즐길 날이 올 것이다. 적응이란 거부할 수 없이 주어진 것에 나를 맞추는 일, 남이 붙여준 이름에 대답해야 하는 것과 같다. 수동적으로 시작했으나 능동성을 획득할 수 있다면 제 삶의 틀 일부를 다시 짜고 보편질서의 폭을 넓히는 일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를 줄이며 참고 눈치보는 짓만은 아닌 거다. 시간과 의지가 어깨 겯고 두런두런 티격태격 가야할 길. 생활이 내게 적응하는 생활에 내가 적응하도록 만들겠다,고 생각한다. 이거 참 그럴듯한 말이다. 말은 쉽지,가 아니라 말도 어려운 말이네. 그러니 생각하게 만들지 못하는 말은 우리를 실천으로 이끌지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새로운 말이 필요한가 보다. 헌 말도 거꾸로 보고 뒤집어서 새 말로 만들어 보자. 밥도 먹자.


파프리카, 당근, 마늘, 깻잎을 곱게 썰어 김을 깔고 두툼한 달걀말이를 했다. 말기도 어렵고 알맞게 익히기도 어렵지만 맛있고 풍성하며 고급스런 달걀말이. 길고 하얀 접시에 담아놓고 보니 색은 예쁘나 잘린 면이 깔끔치 않다. 뜯긴 것 같은 단면이 음식의 체면을 깎는다. 쥘 줄만 알지 칼을 맘껏 쓰지 못하니 도구사용이 미숙함을 알겠다. 칼도 한 번 갈아봐야겠다. 다음엔 더 예쁘고 단단하게 말아서 반듯하게 썰어봐야겠다. 색다른 재료를 넣어서 해봐야지, 네모다랗게 말아봐야지, 언제나 도전거리를 주고 마음먹게 만드는 달걀말이, 멋쟁이.


오랜만에 책을 편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 달걀말이처럼 매혹되고 싶은 제목이다. 공포야 기다려라, 네 권력작동법을 알아내고 한방에 부숴주마, 도전! 이노무 책 봐라? 초장부터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나는 스페인 시골의 기사님처럼 달려들고 있는 것 아닌가? 내가 탄 말은 뭐지, 어떤 창을 들었고? 창? 낫도 못 드는데. 아하, 막무가내와 똥배짱! 이거다, 진정 부러웠던 것. 이거야말로 내가 맘대로 부리고 싶었던 거다. 전진만이 살길이다, 다시 도전, 하는데 떠오른 것은 성희의 야무지고 예쁜 입술이다.


그해 1학기 중간고사 다음날, 1교시 끝내고 교무실로 돌아온 그가 내 옆자리인 자기 자리로 타다닥 와서는 가만히 나를 부른 다음 다짜고짜 말할 때 난 놀랄 새도 없었다.

“선생님! 한주일 내내 배우고 시험보기 전날 딱 집어 정리까지 해줬는데 어떻게 그걸 틀릴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꼿꼿하게 서서, 올려다보는 나를 내려다보며 질문 아닌 질문으로 따지듯 매섭게 묻는다. 흐흐 입술에 저 새내기다운 결기 좀 봐라.


“이해할 필요 없어.”

“네~에?”

“그냥 인정하면 돼. 얘는 이렇구나, 정말 아이들이 저저끔 이리도 다르구나.”

“ !! ”


완전히 똑같아 보이는 잔디 잎새도 들여다보면 하나하나가 다르다는데, (설마, 했지만 정말로 그렇던데) 하물며 사람이야! 내버려 둬, 점수 따위로 무시하며 기죽이지만 않으면 돼. 그놈은 그놈대로 속에 갖가지 싹이 자라고 있거든. 틈만 나면 돋으려 까딱거리고 있다구. 수업에 흥미를 느끼도록 그저 살살 도와주는 거야. 예쁜 부분 찾아가며 칭찬을 해주면 더 좋고. 봐봐 저 헤벌쭉 웃는 모습 예쁘잖아? 애들은 못생겨도 예쁜 겨.


정말 충격적인 말이었다고 좀 지난 뒤에 그는 말했다. 하하핫, 겁도 없는 성희. 은근히 믿고 아꼈던 후배, 조용히 깔끔하게 일 잘하고 졸깃한 영어발음까지 예쁘던 성희. 과수석 졸업에 임용고사도 단박에, 그것도 1등으로 붙었다는 초짜선생 주제에 감히 점수꼴찌들을 이해하려 했던 새내기! 녀석들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지. 어쩌면 저희도 이해하도록 더 잘 가르칠 수는 없는 거냐고 되물을지도 몰라. 이제 막 아이들을 알아가는 그의 열정에도 막무가내와 똥배짱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막무가내로부터 물러나거나 똥배짱을 거두어들여야 할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그러했듯 말이다. 아이들 역시 그렇게 자라고 있을 것이다. 제게 필요하며 맞는 도구와 연장들을 찾고 만드는 중임에 틀림없다. 모든 것이 흔들림 없이 온전한 유년의 환상이 지속될 수는 없으니, 적응도 하고 창조도 하면서 자신을 넓힐 것이다. 배경이자 주인공으로서 한 줄 한 줄 저만의 방식으로 탄탄한 삶의 주름을 획득해 나갈 터이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삼중주 A단조 50

몸통이 후루룩 접히는 단단한 슬픔

두려움 없이 휘도는 정교하고 힘찬 슬픔의 원.

골 따라 돌며 음반을 치고 소리를 흔드는 햇살이 바람났다

숨 쉬는 바람 소리 새파랗다

사랑을 입고 열정의 말을 먹으며 똑똑한 아이들이 자란다

어미아비들은 사람향기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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