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800자)
설날 아침,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흐릿한 겨울 풍경이 스쳐 지나갈 때, 아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 설날은 우리만 내려가니까, 할머니 외롭지 않게 잘 좀 챙겨야 한다.”
운전석에서 툭 던진 말이었다.
옆자리의 엄마는 고개를 깔딱거렸지만, 여전히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끝내지 못한 업무 때문인지, 가벼운 대답조차 없었다.
동생들은 여느 때처럼 “네”라고만 답하고는 다시 각자 이어폰을 꽂거나 게임 화면을 바라보았다.
나는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흐리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아빠의 말을 곱씹었다.
그 한숨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는 올해 아흔이 되셨다.
언제나 기가 세고 완고한 분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할머니는 종종 억센 사투리로 할아버지를 향해 소리쳤다.
“시끄러운 저 영감탱이 왜 못 죽어서 난리인가!”
대개 할아버지는 문맹인 할머니를 놀리려고 굳이 마루까지 나와 낡은 신문을 활짝 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가면, 할머니는 언짢은 듯 호통쳤다.
그 말투 속에는 어딘가 익숙한 정겨움이 스며 있었다.
사납지만 기운 넘치는 목소리. 그것이 할머니였다.
4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할아버지가 떠난 후,
그 사납게만 들리던 억센 사투리는 가야 할 대상을 잃었다.
그저 허공을 맴돌지도 못한 채, 사라졌다.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변함없는 일상에서 여전히 마루에 누워있지만,
이제는 언짢고 정겹던 대상 대신 고요한 집안이 할머니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번 설날은 우리만 내려가니까...'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곱씹던 중,
문득 나흘 전 아빠 방에서 새어 나오던 통화 소리가 떠올랐다.
“그냥 좀 부탁할게 어떻게 좀 안 되겠냐.....”
“형, 나도 힘들어. 우리도 빚이 있는데.”
설마 둘째 큰아빠네 가족마저 할머니를 외면한 것일까.
괜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끝으로, 우리 친가는 더 이상 명절에 모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설날은 북적이는 마루에서 윷놀이를 하며 웃고 떠들던 날들이었다.
어색함과 즐거움이 뒤섞인, 푸근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4년째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렇게 차 안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너머로 태양이 서서히 기울었다.
그리고 내 눈꺼풀도 점점 졸음에 젖어 내려갔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었다.
하늘은 태양 대신 달을 띄워 올렸고,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댁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지난 크리스마스의 잔재처럼 얇게 쌓인 눈이 발끝을 감쌌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었기에,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찬 바람이 두꺼운 잠바 안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몸을 움츠린 채 서둘러 할머니 댁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얼어붙은 문손잡이를 잡았을 때,
어디선가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 손수건으로 코를 풀고 계셨다.
너무 자주 코를 닦으셨는지, 코 밑이 헐어 붉은 피가 배어 있었다.
눈앞에서 울고 계신 할머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었다.
순간, 멍해졌다.
하지만 열린 문 사이로 스며든 찬바람과 함께 가족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아앗!" 하는 탄성과 함께 번쩍 정신이 들었다.
잠시 후, 엄마를 비롯해 나와 동생들은 과장된 목소리 톤과 서글픈 표정으로,
마치 10년 만에 재회한 이산가족처럼 호들갑스럽게 할머니를 감싸기 시작했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할머니가 왜 우셨는지 알 수 있었다.
"큰애는 저번 주에라도 와서 인사를 하고 갔는데, 잘 오던 둘째는 이번엔 못 온다며 소리만 지르더라.."
할머니는 크흥! 하고 코를 풀더니, 눈물과 콧물이 뒤섞인 채 서러움 가득한 말을 이어갔다.
"이 늙은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그깟 땅이 대체 얼마나 한다고, 자식들에게까지 버림받아야 하냐."
할머니는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해 두셨다.
물론, 둘째 큰아빠네 가족 몫까지 함께 차려져 있어, 식탁은 더욱 푸짐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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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키워봤자 소용없다! 자식들 모이는 꼴 하나 못 보니, 내가 콱! 죽어야지!”
갑작스러운 소리에 엄마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했다.
동생들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어설픈 위로를 건넸다.
"할머니 된장은 세계 5대 유산감이라니까요! 그러면 안 돼요!"
"제 결혼식 때까지는 버티셔야죠! 신부 들러리 해주셔야 해요!"
식탁은 4년 전과 비교해 한없이 조용했다.
이런 현실이 약간은 서글펐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밥을 씹을 뿐이었다.
씹던 도중,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부엌문 위, 커다란 액자 속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 팔순 기념으로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둘러싼 친가족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배너도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라봐도 사진 속 밝게 웃던 모습과 지금 내 앞에 앉아 계신 할머니는 너무나도 달랐다.
마치 그 배너에 적힌 문구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 할머니는 밥 한술 뜨지도 않은 채, 주름진 손으로 약봉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검버섯이 박힌 손등이 유독 초라해 보였다.
할머니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더 살아서 뭐 하겠니... 내가 죽어야지."
평소에도 "다 귀찮다." 하며 덤덤한 태도를 보이시던 할머니였다.
원래도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오늘만큼은 꼭 말동무라도 되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 가족들은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아빠는 운전으로 피곤해 잠을 자고, 엄마는 아프신 할머니를 대신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동생들은 학업 스트레스를 핑계로 안방에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 역시 특별히 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흘러가는 명절의 밤.
마루에 누운 할머니와 나.
단둘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