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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상의하시고, 신중히 판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의사는 서류 한 장을 조용히 건네며, 조용히 말을 마쳤다.
그것이 주름진 손끝에 닿기 전까지, 내 눈에는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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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겨울이었다.
뼈가 부러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할머니는 길바닥에 쓰러졌다.
비닐봉지가 바닥을 굴렀다. 귤 몇 알이 흩어졌고, 싸구려 반찬통에서 국물이 스며 나왔다.
눈발이 흩날리는 시장 골목길에서,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엇갈렸다.
누군가는 발길을 재촉했고,
누군가는 머뭇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빙판이었다.
한쪽 팔이 기묘한 각도로 꺾였고,
허리는 충격을 버티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낯선 병실 천장이 보였다. 할아버지가 입원한 병동과 불과 몇 층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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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째 되던 날, 친가족들이 병문안을 왔다.
아버지의 형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형제들의 손에는 어김없이 건강음료 세트나
과일 바구니 같은 병문안 선물이 들려 있었다.
“애들 크는 게 눈에 보이네.”
“그러게. 이제 곧 대학 갈 나이네.”
“놀 때는 놀고, 공부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한다.”
첫째 큰아빠가 들고 있던 봉투에서 유리병들이 부딪히며 짧고 맑은 소리가 났다. 그는 과일 음료 하나를 건네며 "마셔라."라고 말했다.
그 사이, 둘째 큰아빠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더니,
내 손에 용돈을 쥐어주며 "공부 열심히 해라."라고 미소를 지었다.
오른손엔 음료, 왼손에는 돈.
나도 덩달아 같이 미소를 지었다.
형제들은 하나둘 할머니 곁으로 다가가 따뜻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주변 가족들도 모여들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환자복을 정돈해 주었고,
누군가는 과일을 깎으며 작은 웃음을 흘렸다. 병실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분위기로 채워졌다.
할머니는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반대쪽 팔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오랜만에 뵙는 할머니였지만, 환자복 차림에 우울한 표정은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은 왠지 모를 먹먹한 감정이 밀려왔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의 할머니는, 자신을 돌보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전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워도, 그 곁에서 웃고 이야기하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 화목함과 따뜻함이 느껴졌다.
'내가 아니더라도 할머니를 걱정하고, 챙기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감을 느꼈고,
괜한 걱정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득문득 그들의 시선이 엇갈리는 모습도 보였다.
형제들은 중간중간 말끝을 흐리거나,
어색하게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과
더불어 가끔씩 짧은 정적이 끼어들기도 했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이 그래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눈치를 살피며 망설였고,
누군가는 열린 병실 문을 한 번 훔쳐보았다.
그럼에도, 아무도 이상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요즘 취업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나도 한때는 이런저런 기회가 있었는데, 결국은 선택과 집중이야."
"대학생활은 어때? 내가 너 나이 때는 학비 벌겠다고 공사판에서 일하면서 막 바쁘고 정신없었는데."
여럿 이야기가 오갔지만, 형제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카들에게만 말을 건넸다.
그 속에서 병실의 공기는 어색하지 않게 따뜻하게 흘러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그들은 자연스레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형제들 사이에서 할머니의 입원비에 관한 이야기가 조심스레 오가자, 나는 눈치를 보며 병실의 문에서 가장 먼 창가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문 옆, 가장 가까운 자리에 계셨기에, 나는 그녀로부터 최대한 멀어지려고 했다.
창가에 서서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시간이 흘러가기를 바랐다.
얼어붙은 세상이 조금이라도 따뜻해지길, 이야기가 서서히 저물어가기를.
그러던 중,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흰 가운을 입고 안경을 쓴, 마흔쯤 되어 보이는 남성이 병실로 들어왔다.
손에 든 서류를 읽으며 무언가 설명을 이어갔고, 묵묵히 건네는 그의 모습은 전형적인 의사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의사가 서류를 건네고 자리에 사라지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따뜻한 병문안 인사의 끝은,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터져 나온 고성과 싸움.
날카로운 말들이 병실을 가득 메웠다.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에 묵직한 공기만이 남았다.
형제들은 하나둘 병실을 떠났고, 병실에 남은 것은 나와 아버지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곧 떠날 시간이 다가오는 듯했다.
아버지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한동안 시간이 멈춘 듯 병실은 고요했다.
그는 조용히 할머니가 누워 계신 침대 옆에 살포시 앉았다.
나는 그 시각, 싸움을 피하고자 병실 문 밖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문 틈 사이로 아버지를 지켜보며, 이 순간이 어떻게 지나갈지 몰랐다.
할머니는 링거를 맞고 있는 손으로 바닥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으며 휘저었다.
그 휘젓는 방향으로 서류가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것을 잡으려 애쓰시는 듯 보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아버지가 천천히 집어 들었다.
조심스레 그 서류를 움켜잡으며, 아주 작은 떨림과 함께 눈물을 떨구었다.
할머니는 휘젓던 손을 멈추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창가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드리운 주름진 눈가에, 조용히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는 할머니 앞에 선 채로, 한동안 말없이 손에 든 서류를 바라보았다.
열린 창으로 불어온 바람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맑은 하늘 아래,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걷는 동안 병원 복도는 싸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는 조용히 중환자실로 발길을 돌렸다.
간호사의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지만,
발걸음이 멈춘 곳에서 어깨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처럼.
그저 아버지는 눈을 감고 고개를 약간
숙일 뿐이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어쩌면 기도를 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기도가 어디를 향하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누운 사람이,
마지막일 거란 것도.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의식불명인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그의 입술에 달린 산소호흡기가 선명했다.
침대를 둘러싼 각종 의료 장비들이 내는 소리가 유독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깜빡이는 모니터 박자에 맞춰 삐- 소리가 리듬처럼 규칙적으로 들렸다.
차가운 기계음만이 침묵을 깨며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맥박을 알려주는 모니터를 바라보며,
나는 점점 시선이 흐려졌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뒤엉켰다.
"충분히 상의하시고, 신중히 판단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의사가 서류를 건네며 남긴 말과
그때 링거가 꽂힌 주름진 손으로 서류를 받는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그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던 듯 평온했던 병실.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써도, 그때의 씁쓸한 감정은 떠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무엇일까.
고성을 지르며 서류를 내던지는 모습이 선명했다.
정말, 이 모든 것이 돈 때문이었을까. 큰아빠에게 받은 용돈이 주머니 속에서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사람은 결국, 이렇게 늙어 불쌍한 최후를 맞이하는 걸까. 중환자실에 누운 할아버지와 병실에 드러누운 할머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이런 어른들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했다.
그저 숨을 쉬는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내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공기가 한층 더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잡한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순간, 세상이 한없이 낯설고 어지럽게만 느껴졌다.
의사가 남긴 서류 속 첫 문장.
그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연명의료중단 등 결정에 대한 친권자 및 환자가족.... 관련....'
입술이 순간적으로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잃어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