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4500자)
불과 몇 시간 전, 이곳으로 오는 길에 들려온 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을 맴돈다.
할머니 병실에서 터져 나온 첫째 큰아빠와 둘째 큰아빠의 고성.
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남아,
떠나지 않는다.
“돈 좀 더 보내라고 했잖아. 그 돈이 아까워서 아버지가 이 지경까지 온 거야?”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병실을 가로질렀다.
첫째 큰아빠였다.
“아버지 입원비는 형제들이 나누어 부담하기로 했잖아. 형이 그런 말할 처지야?”
둘째 큰아빠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형들, 이제 그만하고 어머니부터 신경 쓰자. 여기서 얘기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아버지가 조용히 끼어들었지만, 금세 묻혀버렸다.
눈치를 보던 가족들은 하나둘 자리를 떴고,
결국 병실에는 할머니와 그녀의 자식들만 남았다.
나는 창가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제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해.”
둘째 큰아빠가 무겁게 입을 뗐다.
“아버지 상태는… 의사가 저렇게 말은 했지만, 우리 다 알잖아. 이 이상은 안된다는 거.”
그는 시선을 떨구고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 이제 그만 쉬게 해 드리자.”
적막이 병실을 짓눌렀다.
천장에 걸린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며 한 바퀴를 다 돌기 직전, 누군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가 뭔데 아버지를 살려라, 죽여라 결정을 해?”
첫째 큰아빠였다.
“그럼 형이 전부 부담할 거야?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둘째의 말에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첫째 큰아빠는 눈가를 문질렀다.
“‘할 만큼 했어’가 뭐야? 넌 돈이라도 제대로 빌리려는 시늉은 해 봤냐?”
그는 할머니 손에 들려 있던 서류를 홱 낚아챘다.
“이건 어디까지나 권고 사항이야! 며칠만 더 지켜보면—”
“어디서 빌릴 건데?”
둘째 큰아빠가 말을 끊으며 서류를 다시 빼앗았다.
하지만 목구멍에 걸린 답답한 감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터져 나왔다.
“형이 그럴 깜냥이나 돼? 이게 상식적으로 빌린다고 해결될 금액이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빚까지 내서 연명치료를 하면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셔? 돈이 필요하면 이젠 형 혼자 알아서 해.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말이 끝나자, 다시 어색한 정적이 스며들었다.
그는 아버지를 한 번 훑어보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형, 나도 아버지 살리고 싶어. 근데 우리 다 알고 있잖아. 이건 그냥 시간문제라고.”
그는 뜸을 들이면서도 망설이는 듯 말을 천천히 덧붙였다.
“이렇게 계속 붙잡아두는 게... 정말 아버지를 위한 거야? 형 이 집안의 장남이라면.. 제발 현실적으로 선택하자.”
긴 침묵이 흘렀다.
매달 수백만 원씩 나가는 할아버지의 병원비.
처음에는 아버지를 향한 당연한 도리라 여겼고, 형제들은 망설임 없이 그 비용을 나누어 부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도리는 점차 희미해져 갔다.
책임은 무거운 부담과 끝없는 망설임으로 변했고, 서서히 서로의 마음속에서 비용을 떠넘기려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누적된 의무감 속에서 그들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의 산소호흡기를 떼야할지, 아니면 계속 유지해야 할지.
모두가 망설였지만, 답은 이미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두 형제의 대화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이 대화에서 가장 치명적인 점은, 둘째 큰아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첫째 큰아빠가 순간적인 감정에 목소리를 높여도,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
퇴직금 외엔 별다른 수입이 없었고,
식당을 운영하던 아내는 무릎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 비용조차 버거운 현실 속에서,
두 자식까지 키워야 했다.
더는 오지랖을 부릴 처지도, 내놓을 여력도 없었다.
그저 주먹을 꽉 쥔 채, 스스로를 다잡을 뿐.
이 억울함을 삼켜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참아야 했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억눌렀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 대화에서 가장 불편한 진실은,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뿐이었다.
짧은 침묵 끝에, 첫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선택이라... 너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근데.”
그는 천천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그 말을 하는 게 좀 우습지 않냐?”
그 미소에는 가소로움이 묻어 있었고,
둘째 큰아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뭐?”
"너 그때도 우리한테 ‘현실적으로 생각하자’고 했었지? 그래놓고, 네가 사업한다고 입으로 날려먹은 돈이 얼마인지 기억은 하냐?"
그는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몇 번이나 손 벌렸는지, 쌓인 돈이 몇 천은 넘는지도? 지금까지 그 돈만 제대로 갚았어도, 우리가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거 아니야."
"지금 와서 그 얘기하면 뭐, 내 주머니에서 돈이라도 나오냐?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잖아."
“아, 그때는 사정이 그랬지.”
그는 비웃듯 말을 이었다.
"그래, 근데 지금도 결국 똑같잖아? 네 사정은 그렇게 중요하면서, 아버지 사정은 안중에도 없다는 거 아니냐."
"그럼 어쩌라고? 그렇게 몰아붙인다고 없던 돈이 생기기라도 해?"
둘째 큰아빠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자,
“없던 돈? 너 말 잘했다.”
첫째 큰아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싸늘한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최근에 엄마한테까지 손 벌렸잖아. 아버지 가게 담보로 대출받은 거, 이제 엄마 명의인데, 우리한테 말 한마디 상의 없이 그냥 가져갔더라?”
둘째 큰아빠는 묵묵히 표정을 굳힐 뿐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모 재산 뜯어낸 사업 자금마저 탕진했냐는 거다. 아버지 입원비는?”
둘째 큰아빠는 말문이 막힌 채,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그런 건 또 어떻게 알았냐.”
“너 빌려간 돈으로 사업 말아먹은 게 어디 한두 번이여야지. 지금 아무것도 못 하고 있잖아. 너 그거 갚을 생각이나 했냐?”
서로에게 던지고 싶어 근질거리던 말들이 터져 나오듯, 짧은 시간 동안 대화는 결론 없이 흘러갔다.
그 과정에서 내가 알든 모르든, 두 큰아빠의 오래된 비밀들이 하나둘씩 스며 나왔다.
“그럼 형은?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끌려왔는데? 네가 뭐라고, 우리는 언제까지 아버지 때문에 입원비 빚지고 살아야 되는데?”
“끌려와?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가 너한테 해 준 게 얼만데?”
“그렇게 따지면, 너야말로 얼마나 받아먹었는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서 다 해야 했어.
너는 장남이라 손 안 벌려도 엄마가 알아서 챙겨줬잖아.”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화의 흐름은 점점 비틀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할아버지를 살릴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었다.
모든 시선과 언어는 둘째 큰아빠에게로 향했고, 대화는 점차 맹목적인 비난으로 변해갔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끝내 풀리지 못한 매듭과도 같았다.
둘째 큰아빠는 한숨을 쉬었다.
“그만하자.
엄마 앞에서 뭐 하는 꼴이냐.
이미 훤히 답이 보이는 문제 가지고,
너는 항상 그런 식으로 책임을 돌리면 문제가 해결이 되냐?”
그는 둘째 큰아빠가 쥐고 있던 서류를 홱 낚아챘다.
순간적으로 움켜쥐려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첫째 큰아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서슬 퍼런 눈빛을 번뜩였다.
그리고는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잖아?”
둘째 큰아빠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첫째는 잠시 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둘째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 듯 말했다.
"고작 그 허름한 가게 하나 갖겠다고 상속 포기 각서를 쓰는 게 어떠냐며 지껄인 게 다가 아니었잖아. 가게 말고도, 다른 것도 그랬잖아."
둘째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 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병원비는 꾸준히 내왔어."
“그거 하나 했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그래서 형은? 병원비 한 푼이라도 제대로 낸 적 있어?"
첫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최소한 부모한테 손 벌리진 않았다.”
"그럼 뭐? 형은 자식으로서 제대로 한 게 없으니까, 지금 아버지 목숨을 볼모로 잡고 효자 행세라도 하겠다는 거야?"
공기가 탁해졌다.
말은 더 거칠어지고, 감정의 날카로운 칼날이 서로를 향해 서슬 퍼렇게 세워져
오래도록 쌓여온 분노와 원망이 날 것 그대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자기 사업할 때는 중요하다고 뻔뻔하게 손 벌리더니, 이제 와서 입원비 아깝다고 아버지 목숨을 끊자는 말이 쉽게 나와?"
첫째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지만, 말의 뉘앙스를 살짝 비틀었을 뿐 그 의미는 명확했다.
둘째의 입술이 떨렸다.
첫째는 고개를 돌려 막내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안 그러냐, 상철아? 내가 지금 고집 피우는 걸로 보여?"
아버지는 침묵했다.
표정은 감정을 숨기려 애쓰고 있었지만, 미묘하게 경직된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첫째는 이번엔 할머니를 향해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도 저놈 말 듣고 돈 빌려줬으니까 이 지경이 된 거 아니야? 입원비 저울질이나 하고!
자식 입에서 아버지 목숨 끊자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가당키나 해?”
불편한 진실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말로 직역되었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떨리는 손끝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붉어진 눈시울이, 그 침묵 속에서 모든 답을 내주고 있었다.
순간,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탁!
손에 쥐고 있던 서류가 첫째 큰아빠의 손에서 나뒹굴었다.
둘째가 내친 것이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부릅뜨고 첫째를 노려보았다.
마치 임계점을 넘어선 화산처럼, 폭발 직전까지 차오른 얼굴로 그는 이를 갈았다.
“야, 이 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