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2300자)
고요한 밤, 창밖으로 번진 달빛을 바라보며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모든 뒤엉킨 생각들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그 사이, 나는 살짝 열었던 문을 다시 닫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 불편한 감정에 따라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모른 척하는 게 더 쉬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손끝에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문손잡이가 서늘했다.
이 감정을 외면한 채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또다시 후회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럴 때가 많았다.
떠나보내고도 붙잡지 못한 순간들.
할아버지를 떠나보낼 때도, 친구를 잃었을 때도,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졌을 때도, 나는 늘 그랬다.
시간만 있으면, 돌이킬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시간이 공평하게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모른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별을 맞이했을 때, 가장 후회스러웠던 순간은 할아버지를 떠나보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유독 형제처럼 가까웠던 그 친구였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월요일 아침. 창밖엔 햇살이 퍼져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불속에서 꾸물거렸다.
"언제까지 잘 거야! 학교 안 가?"
엄마의 잔소리에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하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던 순간, 습관처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흐릿한 정신으로 화면을 확인하는데, 순간 눈이 번쩍 떠졌다.
뜬금없이 온 연락.
메시지를 다 읽기도 전에, 방금까지 남아 있던 잠기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온몸이 굳었다.
그날,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공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머릿속은 그 메시지 하나로 가득 차 있었다.
학원에서는 왜 멍하니 있냐며 욕을 먹었지만, 그때는 그것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학교 졸업 이후로 우리는 연락만 주고받았다.
개인적인 사정과 더불어 바쁘다는 이유로 만남을 피하던 그 친구.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그 친구와의 우정은 영원할 것 같았고, 언젠가 성인이 되어 함께 추억을 나누는 그런 찐득한 사이가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연락은 자연스레 소홀해졌지만,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시절, 어른들은 아마 모두가 "그때는 그런 거다." 하며, 공부에만 전념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했을 테니.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얼굴이 이렇게 또렷하게 떠오르는 걸까.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순간들이, 이제 와서 가슴에 깊은 여운으로 남아 있는 걸까.
그 친구는, 잦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괜찮다”며 자신감을 보였던 녀석이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그는 종종 자신의 사진과 함께 "나는 잘 살아가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며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내가 힘들 때마다, 그가 던진 말들이 위로가 됐고, 그가 힘들 때 나는 그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몸은 떨어져 있어도 형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그 메시지가 왔다.
마지막 연락을 주고받을 때,
내가 그 징후를 눈치챘다면,
그리고 먼저 다가갔다면,
크게 달라졌을까?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고통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실제로 겪어 나니 3일 동안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고통을 알게 된 후로, 할머니가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지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었다.
왜 하필, 그 친구와 울면서 영화 보던 순간까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그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인연이 어떻게 저물어 갔는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다가가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려웠다.
그 친구에게도, 지금까지 할머니에게도.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답답한 마음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불안한 감정이 이번에는 용기로 바뀐 것 같았다.
그렇다.
오늘은 설날이다.
그리고 아마—
이번 설날이 지나면, 할머니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적어도 남은 시간만큼은,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할머니와 나,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다.
설날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
나는 문손잡이를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잠시 문 앞에 서서 발길을 돌렸다.
내 걸음은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향해 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주저하던 발이 점점 가벼워졌다.
내 발소리가 들려서였을까.
할머니는 천천히 내가 걷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그 눈길이 닿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섰다.
"왜 방에 안 들어가고 여기 있니?"
"... 그냥, 마루가 편해서요."
"그래..."
나는 자연스레 할머니 곁에 앉았다.
할머니의 얼굴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눈빛 속에는 묘한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할머니의 모습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할머니의 처진 눈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시 나를 의식한 듯, 할머니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천천히 내뱉었다.
힘겹게 다리 옆을 손으로 툭툭 치더니, 마치 오래된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듯,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비틀린 허리를 두어 번 손으로 문지른 뒤, 겨우 등을 장롱에 기댔다.
할머니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천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 다 떠나고 나만 남아부렀네."
그 말에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공기가 한층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4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유독 오늘 밤처럼 공기가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