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자.
“야, 이 새끼야. 너 진짜 돈이 없어서 이러는 거 아니잖아? 아버지 논밭 팔아서 나온 돈은 그럼 어디로 갔는데?”
첫째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향해 말을 이었다.
“엄마도 어떻게 상의 한마디 없이 아버지 땅을 넘겨? 그게 아버지 유일한 재산이잖아.
등기부등본만 조회해 봐도 다 나오는 걸.”
할머니는 의아한 얼굴로 첫째를 쳐다보았다.
“유산...?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한 번도 그런 땅을 넘긴 적이 없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첫째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엄마, 둘째한테 수십 장의 서류에 서명하거나 도장 찍어준 적 있어?”
할머니의 얼굴이 땅에 떨어졌다.
“병원비 절차 때문에 필요하다고... 하긴 했는데...”
기억이 났다. 영감이 입원했을 때, 둘째가 여러 서류를 내밀었다.
‘엄마, 그냥 싸인만 하면 돼. 너무 걱정하지 마.’
별생각 없이 도장을 찍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그것뿐이다.
못 미더웠던 자식이 자진해서 병원비를 다 부담하겠다고 했을 때는 기특하고 뿌듯했다.
이제껏 못해준 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게... 설마...
할머니의 손이 떨렸다.
“상문아... 이 글도 못 읽는 늙은이가 뭘 알겠니... 나는 잘 모르겠다...”
첫째는 상황을 짐작한 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둘째를 쏘아붙였다.
“야, 너 말 똑바로 해. 설마...? 엄마 속여서 빼돌린 거야?”
둘째는 표정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저런 꼴인데, 나라도 재산을 굴려야지. 애초에 아버지가 매각하려고 하기 전에 나랑 끝낸 이야기야.”
순간 허공을 가르며 손이 뻗었다.
첫째의 손이 둘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너 엄마가 문맹인 걸 알고 사기 친 거야?
왜 그 땅까지 네 명의로 돼 있어야 하는데?
유산 포기 각서도 그렇고,
니 눈에는 우리가 그렇게 머저리로 보이냐?”
둘째는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네가 똑바로 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이미 법적으로 다 끝난 일이야. 소송이라도 걸면, 한 푼도 없는 거지들끼리 잘 싸운다고 아버지가 우시겠다."
“백 번 양보해서 그게 네 거라고 해도,
우리한테 빌린 돈은 갚아야지.”
둘째가 느릿하게 대꾸했다.
“진짜 뚫린 입이라고 쉽게 쉽게 말하는 형의 뇌가 나는 부럽다. 그러니깐 형이 항상 내 아래인 거야.”
누가 주먹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숨 막히는 순간.
최대한 존재감을 숨기려고 핸드폰 화면만을 무의미하게 쓸어내리고 있을 때,
아빠가 나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가 있어라.”
고개도 끄덕이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문 앞까지 걸어갔다.
숨을 참으며 재빠르게 병실 문을 여는 순간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문을 닫는 순간—
“개썅놈 새끼야!!!”
“형들도 이제 그만해!!! 엄마랑 애들 앞인데!!”
마치 내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폭발하듯 욕설이 병실 밖으로 터져 나왔다.
이를 말리는 듯한 아빠의 절박한 목소리도 함께 섞여 있었다.
병실 문 앞 공용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낀 채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한 6번째 똑같은 곡을 되풀이하며 들었을 때, 병실 문이 열렸다.
첫째 큰아빠였다.
마치 한참을 달린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굳은 얼굴로 병원을 빠져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마치 재판에서 패소한 사람처럼 억울함과 불만이 가득 서려 있었다.
곧이어 둘째 큰아빠가 나왔다.
그는 한결 덤덤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이 간 안경 너머로 스며든 창가의 햇빛이 그의 눈빛을 선명하게 비췄다.
둘째 큰아빠는 말없이 담뱃갑을 꺼내 들고 천천히 복도로 걸어 나갔다.
그날 이후로, 첫째 큰아빠는 명절이면 더 이상 친가에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둘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 감정은 점차 엄마에 대한 섭섭함으로까지 번졌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앉아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안타까웠다.
그 틈으로 아버지의 모습도 같이 보였다.
그는 조용히 할머니의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하듯 곁에 앉아 있었다.
마치 피로 이어진 모자(母子)의 모습처럼.
아버지는 한쪽 손에 어떤 서류를 쥔 채, 천천히 병실 문을 향해 걸어왔다.
점점 다가오는 그의 조용한 눈빛이 문틈 너머에서 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이내 병실 문이 열렸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다.
진이 다 빠진 듯, 몇 초간 침묵을 지키다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우리 앞에서 좀처럼 내색하지 않던 피로가 얼굴에 깊이 서려 있었다. 마치 우려했던 일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는 듯한 얼굴로.
“가자. 할아버지 얼굴 한 번 보고 가야지.”
나는 ‘할머니는 괜찮아요?’라든가, ‘큰아빠들이 서로 싸웠나요?’ 같은 눈치 없는 질문을 속으로 삼킨 채, 짧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말없이 복도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문틈 사이로 보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앉아 있던 할머니.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은 맑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순간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슬슬 할아버지의 면회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푹 숙인 아버지의 눈 아래로 물방울이 몇 개 떨어졌다.
이내 실처럼 가느다란 물줄기가 아버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한쪽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힘껏 구겨 쥐었다.
구겨진 서류의 맨 아래, 아버지의 필체로 남겨진 서명이 보였다.
그리고 그 서류의 헤드라인도 같이 보였다.
“연명의료중단...”
그 이상은 읽고 싶지 않았다.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나도 아버지의 나이가 되면, 이런 순간을 마주할 수밖에 없겠지.
막연한 미래의 모습이 현실처럼 다가와,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뵙고 중환자실을 나섰다. 문을 나서기 직전, 터지는 고함과 소란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으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왠지 더 안타까웠다.
짧은 작별 인사를 하듯,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았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만 남긴 채, 새파란 하늘은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감싸는 가운데, 바람이 불어 하늘로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찬바람이 스치자 내 머리칼도 함께 흩날렸다.
왠지 모르게, 저 멀리 떠나가는 구름을 보며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차 안에서는 침묵만이 이어졌다.
아버지도, 엄마도, 나도
아무 말 없이 그 조용한 순간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