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위선에 대해서_아이 체벌과 훈계

by 오인환


멀리 500m에서 커다란 덤프트럭이 달려온다. 강아지는 그것도 모르고 차도에 있다. 먹이로 유도한다. 욕도 해본다. 칭찬도 해본다. 트럭과 강아지의 거리는 이제 400m. 강아지는 위험한지도 모르고 순진하게 놀고 있다. 차는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강아지를 구출해야 한다. 300m. 더 고민할수록 트럭은 가까워진다. 먹이도 칭찬도 욕도 먹히지 않는다. 200m. 이대로 가다가는 강아지는 차에 치여 죽는다. 강아지에게 달려간다. 100m. 강아지에게 왔다. 말한다. '어서 나와!' 강아지는 나를 보며 '으르렁' 거린다. 앞니를 드러내고 사나운 표정을 짓는다. 50m. 강아지를 잡으려 한다. 강아지는 발톱을 드러내고 나를 할퀴고 문다. 10m.



자.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옵션은 무엇이 있나.



위선은 집어 치우고. 폭력은 나쁘다. 다만 나는 있는 힘껏 강아지를 걷어 찬다. 강아지는 '깨갱' 거리며 차도 밖으로 나가 떨어진다. 강아지 시선에 느닺없이 얻어맞은 '폭력'만 가득하다. 이제 감내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강아지를 걷어찬 자책과 강아지로부터의 원망. 그것이 후유증으로 따른다. 시간을 돌려보자.



차도에 강아지 한마리가 서 있다. 강아지에게 차도는 위험하다고 일러준다. 강아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달래고 인도한다. 잠시후 강아지는 다시 차도 위에 서 있다. 이번에도 잘 일러준다. 정신 팔고 있는 사이. 강아지가 차도에 다시 나가있다. 먹이로 유도한다. 강아지가 좋아하는 사료를 올린다. 강아지는 사료를 먹는다. 이제 해결인가. 아니다. 강아지가 다시 차도 위에 서 있다. 먹이를 줘도 꿈쩍 않는다. 배가 부른 모양이다. 구슬려보고 욕해보고 달래보고 먹이로 유인해 본다. 듣는 척도 안한다.



다시 트럭은 다가왔고 10m 앞에 도달했다. 강아지는 발톱을 드러내고 나를 할퀴고 문다.



자. 이제 다시 내가 강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옵션은 무엇이 있나.



머뭇거린다. 트럭은 강아지를 밟고 지나간다. 강아지의 내장이 아스팔트 이곳 저곳에 문드러진다. 살점은 찢기고 피가 산재하다. 후회로 가득차다. 조금만 빨리 선택해다면 강아지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자. 다시 마지막으로 시간을 돌린다.


트럭과의 10m.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강아지를 위한다는 옵션은 강아지의 생명을 위험케 한다. 강아지를 위한다는 옵션은 원망을 듣고 자책을 하게 된다. 다만 코 앞에 커다란 트럭이 강아지를 깔고 지나가기 직전이라면 옵션은 많지 않다. 만약 나라면 있는 힘껏 강아지를 걷어 차겠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비인격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차선'이다. 혹은 '차악'이다. 어쨌건 최악을 피하는 것은 중요하다.



조던 피터스 교수의 책에 그닥 공감하진 못했지만, 그가 했던 말 중 '훈육'에 대해 공감된 부분이 있다. 훈육.


아이를 훈육하는 것에 '죄스러움'을 가져야 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 됐지만 교수는 훈육하라고 했다. 필요하면 체벌하라고 했다. 체벌하지 않고 훈육하지 못한 교육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고 했다. 마치 비문명적으로 보이는 방법이지만 즉각적이고 확실한 방법이기도 하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수위아저씨는 초등학생들이 분리수거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뺨을 후려 갈기셨다. 학생에게 의자를 집어 던지거나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하는 일도 적잖게 봤다. 그 정도의 폭력은 용인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차도 위에 올라간 강아지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폭력만이 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답을 모른다. 그나마 본능처럼 어쩔 수 없이 움직여지는 부분이 있다. 제주에서 종종 야생동물들이 차도로 튀어 나올 때가 있다. 초보 운전자들은 그것을 피하려다 되려 큰 사고를 당한다. 고양이나 새를 피하려다가 사망사고까지 이여지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지만 그것을 피하느라 큰 사고가 날 것 같으면, 때로는 그냥 밟고 지나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행위에 비난을 하겠지만, 대안을 제시하진 못한다. 대한을 제시하지 못하는 비난은 그것이 그나마의 최선이라는 의미다.



피치 못할 상황은 언제나 있다. 모든 것을 만족하는 정답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평생 자는 동안 70여 마리의 벌레를 먹는다. 여름이 되면 피를 빠는 모기를 때려 죽이기고 저도 모르게 수 만의 개미를 즈려 밟는다. 지구온난화를 걱정하며 더워지는 여름에는 에어컨 온도를 내리고, 사라져가는 북극곰의 소식을 스마트폰으로 본다. 그 북극곰을 촬영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데이터를 보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탄소가 사용되는지 감도 잡지 못한다. 1년 간 한 사람이 만들어 내는 탄소의 양은 16톤 정도 된다. 인간 하나가 60년을 덜 살면 1000톤의 탄소를 줄일 수 있다. 1000톤이면 승용차 420대가 1년간 배출하는 탄소의 양이다. 축구장 13개 면적의 소나무 숲이 300년간 흡수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이다. 진정 지구를 위한다면 인간 하나가 사라지는게 정답이다. 정말 인간은 지구를 위한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위선인 것 같다.



때를 쓰는 아이를 달래다가 말을 멈췄다. 가만히 아이를 지켜봤다. 아이는 처음에는 칭얼거린다. 가만히 아이의 눈을 본다. 10분. 20분. 30분. 아이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 아이의 고집을 꺾었다. 7살 난 아이가 꼼질꼼질 거리다가 '죄송해요'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얼마가 지나고 '아빠의 시선'에 대해 말한다. '아이는 알았다'고 말한다. 어쩌면 30분의 아이컨텍 동안 아이에게 무언의 폭력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생각했다. 훈육과 체벌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 가능하다면 차선을 택하고 최악을 피하는 방법 뿐이다. 그럴싸해 보이는 '위선'은 스스로와 겉을 모두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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