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독후감
지겨울 만큼 혹독한 가난에 당면한 적 있다. 머리를 자를 돈을 아끼고자 곱슬거리는 머리를 수개월간 자르지 않았더니 앞머리가 눈을 덮고 코밑으로 내려왔다. 사람 몰골 정도는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랍을 뒤적거리고 손톱을 깎던 손톱깎이를 집어 든다. 마트에서 파는 가위는 얼마 하지 않았지만, 그마저 아까워하는 궁상으로 손톱깎이를 들었다. 왼손으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린다. 오른손에 들린 손톱깎이 두툼해진 머리카락 뭉치를 뎅강하고 잘라낸다. 앞과 뒤, 옆을 포함해 깔끔하게 머리를 덜어내니, 그나마 형태가 살아난다. 손톱깎이를 '미용가위'로 사용한 '기지'에 스스로 박수를 보냈다. 얼마 뒤, 손톱을 자르기 위해 손톱깎이를 들었다. 왼손 검지를 '딸깍'하고 잘라내니, 손톱이 '쩍'하고 깨진다. 손톱깎이를 살펴봤더니 그 날카로운 날이 모두 무뎌졌다. 손톱깎이는 그 뒤로 '머리깎이'로 바뀌었으나 손톱을 깎을 때는 쓸모가 없어졌고, 머리를 자를 때는 '형편이 없어졌다.' 정신은 칼과 같다. 칼은 플라스틱도 자르고 콘크리트도 자르고 유리, 금속, 나무, 돌까지 마구 자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분별 없이 사용하면 나중에는 날이 무뎌져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만약 칼을 나무 자를 때만 사용하고 칼집에 꽂아두면 제 역할이 필요할 때 날카롭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정신은 그렇다. 오늘 입어야 할 옷을 고르는데도 사용하고,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데도 사용하고 카드값 정산일을 계산하는데도 사용한다. 분별없이 아무때나 사용하다보면 '정신'이라는 놈은 무뎌져서 결국 가장 중요한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 하찮은 일에도 무분별하게 명검을 깨내들면 그것은 더이상 날카롭지 못한 둔검으로 변한다. 쉴새 없이 돌아가는 무수한 생각과 감정의 회오리에 감정을 모두 소모할 필요는 없다.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다. 머리 속을 돌아다니는 여러 감정과 생각에 모두 칼 끝을 겨눌 필요는 없다. 그냥 조용히 그것들을 지켜보다가 쓸만한 놈에 한 두번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떠오르는 생각을 다 믿지는 말라. 이것은 초능력이다. 내 육체의 화학변화가 만들어낸 '감정'이라는 소용돌이가 '나'라는 착각에 매몰되선 안된다. 그 속삭임을 다 믿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거나 우울이 치밀어 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신체'가 만들어낸 '화학' 물질 농도의 변화라고 생각해보라. 화학물질은 쉴새없이 희석되고 섞이길 반복한다. 그러나 언제나 휘발된다.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감정'이라는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지 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니 내가 곧 생각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아라.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자신과 동일시 하는것은 심각한 문제다. 나는 생각을 관찰하는 존재지, 생각 그 자체는 아니다. 내가 틀릴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가짜' 감정들이 불쑥 찾아온다. 하나 둘 사람들이 잠들고 몸과 정신이 '가라앉는 시간'에 떠오르는 거의 대부분의 생각들은 거짓이고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그 생각과 감정을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라. 슬픈 영화는 슬프지만 그것은 '나'와는 별개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면 그것이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알고 있다. 슬픈 영화를 한 편 정도 보는 것은 취미 생활이나, 같은 영화를 수십번 돌이켜 보면서 그 영화의 인물이 실제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정신병'에 가깝다. 우리는 언제든 TV를 끄고 일상생활을 할 것이고 잠시 그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지하더라도 거기에 매몰되진 않는다. 복지국가 북유럽에 사는 서양인이 태국에서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일이다. 작가는 승려가 된 이후에도 꾸준히 번뇌와 싸운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질투하기도 하고 자기 자책을 하기도 한다. 꾸준하게 자신을 비관하기도 한다. 조용히 내면의 평화를 관찰하고 있을 것 같은 승려도 결국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타인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의 저자 '비욘'은 책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충격을 주는 말을 발견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네가 모르는
전투를 치르고 있다.
친절하라,
그 어느 때라도..
살다보면 너무나 맞지 않는 이들을 마주한다. 내가 이십대 중반에 막 스무살이 된 한 여자 아이를 알게 됐다. 그녀는 내가 일하는 회사의 아르바이트 생이었는데, 눈치도 없고 이기적이며 심지어 예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눈에 성가시로웠던 그녀에게 말할 기회가 생기기를 벼르고 있었다.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그녀가 어느 날, 내가 정한 선을 넘어가는 순간 나는 조용히 불러 그녀를 나무랬다. 그녀는 한참을 울었는데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나의 모습에 잘못이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세상의 무게를 나혼자 짊어지고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남의 눈에는 내 어깨위의 짐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우울증 약을 복용한 적이 있다. 일주일 정도 복용을 했는데, 밤이 되면 잠이 오지 않고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드는 까닭이었다. 한참을 스스로 비관하고 있을 때 쯤, 주변인에게 '불면증'을 이야기하게 됐다. 그러자 주변인은 말했다.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으신데...'
내 무게는 나 혼자 있는 시간 내 속에서 스스로 자체 생산에서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평소 주변인에게 밝고 긍정적인 사람인 듯하다. 나의 무게도 남에게 보이지 않으니, 다른 이들의 어깨에는 내가 생각도 못해 볼 중압감이 누르고 있을 수도 있다. 언제나 누구나에게 친절해야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수필은 호흡을 이야기하고 승려가 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더니 어느 순간에는 다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삶을 이야기한다. 무난하게 읽혀가는 글이 마지막에는 가슴먹먹하게 끝난다. 그냥 그런 '계발서'나 '에세이' 정도로 읽다가 후반부에 급격하게 틀어지는 내용이 여운이 남는다. 이 책을 읽을 다른 이들을 위해 더 이야기 할 수는 없으나, 그냥 아무런 정보없이 나처럼 읽는다면 나와 같은 감동을 느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