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의 말을 믿지 마라.'
희생(犧牲)이라는 변명으로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면 되짚어 보자. 천지 종묘(天地宗廟) 제사 제물로 사용하던 산 짐승이 희생양(犧牲羊)이다.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면 몫을 쳐주는 신과의 거래가 어디까지 성립될까. 어떤 관계에서도 스스로를 희생하면 안 된다. 자식을 위해 '희생양(犧牲羊)'이 된다면, 자식은 무기력한 '희생양(犧牲羊)의 자식'일뿐이다. 연인을 위해 희생양(犧牲羊)'이 된다면, 연인은 무능력한 희생양을 사랑했던 존재일 뿐이다. 누군가를 돕고 사랑하고 믿는다면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버려두고 영광스럽게 타죽어버릴 것이 아니라, 두 발을 땅에 꼿꼿하게 딛고 그것을 지탱하는 '지짓대'여야 한다. 누군가를 밝히기 위해 자신을 태우는 450g짜리 향초는 70시간 모호한 빛을 내며 타고 사라져 버리지만 같은 양의 석유로는 60와트짜리 백열전구를 30시간이나 더 켤 수 있다.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용기는 갸륵하지만, 자신을 태워 버리는 것이 최선은 아니다. 시편 23편 5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잔이 차고 넘친다. 차고 넘쳐 흘러 내리면 그때는 나의 잔을 충만히 채우고도 남아 남의 잔도 잔뜩 채울 수 있다. 심지어 원수의 목전에서조차 차고 남은 내 잔의 여분을 덜어 넣을 수 있으니, '곳간에서 인심난다' 속담처럼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잔이 충만했을 때, 상대에게 채울 수 있는 존재다. 아주 이기적이고 못되쳐먹었다고 보더라도 차지 않은 내 잔을 등 뒤에 두고 남의 잔이나 채우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잔을 채워주는 '희생'해 버린다면 다음 잔은 누가 채워 준단 말인가.
돈도, 사랑도, 지식도 모두 자신의 잔을 채우고 흘러 넘치는 지경에와서 남의 잔을 채우자. 감사함에 감사한 줄 알고, 자신을 충분히 사랑할 줄 안다면, 적잖은 내 잔은 무한대로 흘러 넘쳐 양 옆을 채우고 강과 호수, 바다를 이루고 흐를 것이다. '저 사람은 고마운 줄을 몰라'라고 생각한다면 왜 상대의 '잔'이 채워져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자. '온통 나를 괴롭히는 것 투성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왜 내 주변에는 항상 메말라 있는 것 밖에 없는지 생각해보자. 외부에서 끌어다쓰는 일회성 '행운'이 아니라 내부에서 무제한, 무한대로 뿜어져 나오는 샘물을 들여다보자. 지금 당장 '감사하다'라고 되뇌어도 한 바가지가 채워지고 다시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시 한 바가지가 채워지는 제한없는 마음속 에너지 원천을 고민해보자. 언제부터 굳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만물에 의미를 잃었다. '그렇다' 믿으면 그렇고 '아니다' 믿으면 아닌 것들 투성이라는 사실을 깨치고 난 뒤, 삶이 자유로워지는 수준을 넘어 대책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갖고 싶은 것을 '갖게 해주는 돈'의 의미를 넘어 '생명력을 닮은 성장'에 목마를 뿐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과 직업에서의 진로도 모두 어떤 매너리즘에 봉착했을 때, 무언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잔이 가득찼다는 생각이 들면 갖게되는 사고의 전환은 '남의 잔'을 채우기 시작하거나, '내 잔'을 조금 더 넓혀보는 것이다. 아직 남의 잔을 채우기에 내 그릇의 크기가 작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종지에 넘치는 물보다 항아리가 더 많은 물을 채우고 따라 줄 수 있을 것이다. '짐 콜린스'의 도서 중 'good to great'이라는 책이 있다. 단순히 좋음에 머물러 있으면 '위대함'으로 넘어가기 힘들다. 적당한 사회적 위치가 있고 먹고 살기 좋으면 굳이 불필요한 리스크를 갖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
거지들은 백만장자를 시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더 많은 동냥을 받는 다른 거지를 부러워한다. 시야를 조금만 더 넓히면 전모가 보일 모양인데, 아직도 좁은 시야에서 최선의 것들만 선택한다. 제주에서 김포로 비행기를 타고 가면, 아웅다웅하는 인간사가 너무 하찮게 줄어든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가 오밀조밀 모여 있으면 저 안에 죽고 사는 '즉 생로병사(生老病死),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 (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故)가 다 들어있다는게 놀라우면서 한 편으로 그런 것들이 너무나 하찮아서 개미 세상에 사는 개미에게 주는 연민도 생기지 않는다. 나를 깎아 희생하고 아득바득 상대에게 자신의 희생을 증명하고 원금과 이자까지 받아 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성장하고 자신을 채우고 성장시켜야 한다. 든든한 지지대는 누군가를 지지하지만 한번 사용으로 사라지진 않는다. 더 성장한 지지대는 다음에는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 다음에는 더 큰 성장을 줄 수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배를 갈라 자신의 뱃속을 보여 낼 것이 아니라, 더 잘먹고 더 잘 살아서 더 큰 부와 영향력을 남겨내야 한다. 희생하지 말자. 더 성장하자. 더 행복하고 더 긍정적이라. 그러면 반드시 그것은 차고 넘쳐 주변을 채우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