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폭삭 늙어 버릴 것이다. 피부도 팽팽해지다가 어느 순간 쪼그라 들 것이다. 쪼글 쪼글 쪼그라들다가 다시 어느 순간 나도 남도 그 존재를 잊는 날이 올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했단 기억도 피부처럼 쪼그라들지 모른다. '사랑'이라는 이름은 모든 걸 초월해버리는 아름다움이라고 하지만 변하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한다. 그것이 작동하는 어떤 순간 '상처'가 함께 발동된다. 상처도 사랑과 함께 변형되고 나면 우리는 '감정'을 벗겨 낸 기억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상처가 없었다면 결코 하지 않을 선택, 만남, 행동이 남아 그것이 온전히 '나'라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사랑은 그냥 '감정'이지만 지나 온 행동과 말, 기억이고 지나 갈 행동과 말과 기억이 될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고부갈등'도 사랑과 사랑의 대립이다. 부모 자식 간의 갈등도 사랑의 역효과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도 서로 다른 사랑의 충돌이다. 사랑이 없었다면 상처나 대립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되고 상처를 주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일기가 되기도 하며 우리의 인생이 되기도 한다.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잊혀져 있다가 불현듯 불쑥 불쑥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누가나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냥 나처럼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머릿속에도 내가 몇 번 등장이나 할까. 결국 기억으로 남은 감정없는 모습들에 나는 어떻게 비춰질까.
스쳐 지나갔어야 할 인연에 특별한 기억이 만들어진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갔어야 할 상황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떼어 인연을 시작하기도 하고, 그냥 시간을 채우면 되는 평범한 하루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아무것도 다를 것 없는 공기와 날씨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상대가 뱉은 말과 상대가 했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상대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나면 자신의 행동이 의미가 보여지진 않을까 조심하게 된다. 자신의 행동을 철저하게 검열하고 나면 도대체 '멍청이'가 다름 없는 행동을 반복하게 된다. 만남이 지나고 나면 내가 했던 바보같은 말과 행동, 상대가 했던 귀한 말과 행동이 오버랩 되며 상대에 비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5살 때부터 17살까지 유년시절을 이곳 저곳 유랑하며 자라 온 임경선 작가의 글이다. 주변이 자꾸 바뀌는 혼란 속에서 단단해야 할 자아를 살피고 다른 이들의 자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한다. 사람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호기심은 다면적인 감정을 문학적으로 멋지게 표현하게 한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뒤에는 그 사람을 만들어낸 또 다른 만남들이 존재한다. 남녀의 사랑에는 부모의 사랑의 모습이 있고 부모의 사랑 또한 남녀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좌우로 상하로 잇고 이어지는 사랑의 연결 속에 사람들은 다양한 기억을 만든다. 고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거의 대부분의 기억들은 '사랑'과 함께 하고 있다.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영역을 주관적 영역이었다고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어느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기다림은 기쁨이다. 누군가 나를 만나러 온다는 것도 기쁘지만,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부터가 이미 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가족이나 친적이라는 혈연적 고리가 아니다. 친구나 동료처럼 집단에 속해져 있지도 않다. 완전히 독립된 독립체가 완전히 다른 인연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사랑이 없다면 사람은 전혀 다른 존재들과 결코 교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온전히 전부라고 느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사람은 전혀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되는 존재를 '조건 없이 믿는다.' 다만 그것에 상처를 받았을 때는 상대가 아니라 자신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어떤 것들을 푀하면서 본래의 제산을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사랑은 '자신다운 것'을 '타인'에 의해 희석해 버리는 일이다.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자신'이 되고나면, 타인이 나간 자리는 타인이 아닌 자신의 부재가 되는 것이다. 소설은 그 자리에서 완독할 수 있는 짧은 분량이자만 정확하게 한 주제를 관통하지 않는다.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사랑의 모습과 그 모순들에 대한 감정의 묘사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다른 누군가의 사진'이 아니라 '자화상'이 등장한다. 자화상의 진짜 의미는 내가 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자신을 얼마나 알고 받아들이는지를 들여다 보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는 이미 지나온 상대와 마주한 상대의 모습이 모두 들어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