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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인환 Oct 06. 2022

[소설] 타인에게 자신을 주는 소설_내가 나를 버린 날


 고상한 척 인문학이나 역사 책을 읽어도 좋아하는 장르는 '추리소설'이다. 읽다보면 공식처럼 비슷해지는 특성상 연달아 작품을 읽기 어렵다. 연달아 읽으면 재미는 반감한다. 조용한 저녁, 혼자 간접등을 쐬며 작가가 이끌어주는 스토리에 빠져든다. 추리소설은 너무 재밌다. 분명 가장 좋아하는 장르다. 특히 일본 추리가 그렇다. 일본 소설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 그것은 이상하게도 다른 나라의 추리에 만족하기 힘들게 했다. 일본의 문체는 간결하고 쉽다. 문체가 화려한 한국 소설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예전 인스타그램에 '일본 문체가 쉽다'는 글을 올리자, 익명의 일본인이 기분 나쁘다는 식으로 댓글을 달았던 적 있었다. 분명한 것은 문체가 쉽다는 것이 '수준이 낮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체가 쉬운 것은 읽기 쉽다는 의미고 범용성에서 봤을 때, 글이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본질을 통과한 것이다. 김훈 작가의 글도 상당히 좋아한다. 군더더기 없고 길게 늘어지지 않는다. 토막난 당근처럼 또각 또각하고 단위가 분명하다. 단언컨데 이런 글이 좋은 글이다. 우리나라 문학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한국 문학보다 일본 소설을 더 자주 읽게 되는 이유는 쉽게 읽힌다는 부분이 큰 몫을 차지한다. 일본의 문체는 기교없이 본질을 바로 담는다. 이는 내 말이 아니라 '마이니치신문' 사아다 가쓰미 논설위원의 말이다. 한국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관념이나 명분을 중요시한다. 반면 일본은 관념보다 본질을 중요하게 본다. 실제로 한국어로 된 글을 일본어로 옮기면 글이 담는 어감이 상당히 무거워진다. 우리와 일본은 어순이 비슷하고 한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밖에 역사와 문화 덕분에 이처럼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한국문학은 조금 더 생각해야 볼 수 있다. 조금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가볍게 읽어서는 그것이 담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 차리기 힘들다. 우리는 '영원하다'라는 말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고 표현한다. 이런 표현을 좋아한다. 고로 읽고서 한 단계 사고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 이 말은 한국 문학이 일본 문학보다 깊이가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실제 일본 문학은 세계적으로 인정 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1994년 4월 오에 겐자브로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을 때, 일본의 문학의 능력이 아닌 '로비 능력'이라고 여겼다. 분명한 것은 읽기 쉬운 글은 더 많이 선택받고 더 많은 선택은 소비이며 시장이 크게 형성된다는 것이다. '글'의 특성상, 소비자가 쉽게 생산자로 바뀐다. 많은 소비를 한 이들은 좋은 생산자가 된다. 글은 쉬워야 한다. 머리가 나쁜 나의 기준에 그것은 분명하다. 최근 5권의 집필을 하면서 가장 많이 요구 받은 사항은 이렇다.


 "작가 님, 조금만 더 쉽게 써주세요. 중 2정도가 읽을 수 있도록..."


조선 사대부들은 자신들만의 고유 영역이었던 '문자'가 확대되는 일을 꺼렸다. 글은 기득권의 상징이자 권력이었다. 지금도 의학이나 법학에 관한 문자를 해독하고 이요하는 이들이 비슷한 위치를 갖는다. 조선의 역사가 '문자'에 보수적인 사실은 '한자'라는 비효율적 문자를 고집하게 했다. 일본이 복잡한 한자의 획수를 줄이고 '히라가나'로 만들어 배포할 때, 우리는 끝까지 한자를 고집했다. 조선에 '이도(세종)'라는 천재적 인물이 국왕이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어렵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글을 멋있게 쓰고 '내 문학의 깊이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만 보세요'라고 하는 일은 비효율적인 한자를 고집하던 사대부들처럼 고립을 나타낸다. 분명한 것은 '글은 쉬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20대 초반, 추리소설 원작의 어감을 직접 느끼고 싶었다. 단순한 이유로 일본어를 공부했을 정도다. 지금은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이 많이 식었다. 개인적으로 '북플라자'에서 출판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가볍고 흥미롭다. 사람의 취향은 워낙 다양해서 내 관점과 달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글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하지만 그것은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내가 나를 버린 날'은 인생 막장에 다달은 젊은 이가 자살을 시도하는 순간, 자신의 신분증을 내밀며 자신으로 살아달라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역시나 일본 문학답게 간결하고 쉽다. 다만 그럴 듯한 소재 설정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개연성에 틈이 발생하긴 했다. 인과 관계에 대한 설명없이 직진으로 진행하는 전개가 당황스러운 구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한번 잡으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재밌다. 자살하려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분신'으로 살아달라는 설정. 비슷한 일화는 한국과 일본에서 실제로 존재했다. 법적으로 규정한 '정체성'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물학적 자아'와 일치시킨다. 그것을 버리거나 빌려주거나 만들거나 없애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다. 다만 이런 일을 해버리는 소설 같은 일은 종종 일어난다. 소설은 분명 현실을 담지 않았다. 다만 있음직하게 그것을 서술해가는 과정에서 독자를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독자는 '그렇다치고...'를 외며 작가가 이끄는 전개에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깨닫는다.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시뮬레이션은 물론 무존재를 존재로 만드는 망상이지만, 다시 존재를 무존재로 만드는 '해탈'의 과정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나를 줘 버릴 수 있을 만큼, 법이 규정한 '나'의 정체성은 그처럼 연약하다. 고로 인생이 아무리 고귀한 것이라 하지만 아끼고 아껴서 아무짓도 하지 않을 만큼 고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막 해도 괜찮다.' 인생은 그렇다. 그것은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처럼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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