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이별 당한 지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나는 잠수이별 후유증에 시달렸다. 여러 증상들 중 가장 큰 후유증은 '화'였다. 잘 지내다 있다가 문득 그가 생각나면 너무너무 화가 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내가 뭘 그리 잘못해서 이별 인사조차 못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이제 와서 따져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자각하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갑자기 그가 떠오를 때가 있었고, 또다시 화가 났다. 그럼 당장 멱살 잡으러 갈 태세를 준비하다 이내 부질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가라앉히길 반복했다.
주로 '화'는 평화로운 낮시간에 불청객처럼 찾아와서 나를 괴롭혔고, 밤이 되면 잠수이별의 원인을 찾기 위해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으니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끊임없이 이어졌다. 내가 평생을 생각해도 알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 가지 다행인 건 40대인 나의 나이였다.
밤새 생각할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지 않아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되면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회사 일이 많은 날에는 피곤해서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웃픈 현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잠수이별' 후유증에서 벗어나 '이별'에 익숙해졌다. 마음이 많이 차분해지면서 본격적인 결혼 준비 시작 전에 헤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연스레 더 이상 그의 연락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런데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였는데 잠수이별로 끝내기는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열심히 쓴 책이 완결 직전 중단한 느낌이었다. 이 책을 더 써 내려갈 생각은 없지만 마침표는 찍고 마무리하고 싶다.
내 책이지만 그와 함께 써 온 책이니 마침표도 함께 찍고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마지막 카톡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그에게 카톡을 보내려고 하니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우선 하고 싶은 말을 쭉 써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읽어 보고, 내용을 압축하며 수정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같은 과정을 반복하며 정성 들여 완성했다. 사실 완성이라기보다 계속 보면 수정이 끝이 안 날 것 같아 멈추고 보낼 준비를 했다. 장문의 메시지였는데 핵심 내용은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자는 말이었다. 이게 뭐라고 많이 떨려서 주저하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서둘러 전송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 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채팅방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1이 그대로 있었다. 마지막으로 다퉜던 그날처럼 또 일찍 잠들었나 보다. 나도 더 이상 카톡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카톡을 확인해 보니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 아직도 안 읽었나 싶어 채팅방에 들어가 보니 1이 사라져 있었다. 설마 읽씹 당한 것일까?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갑작스러운 나의 카톡에 그가 놀랐을 수도 있다. 아침이니 본인도 마음 정리를 한 후, 저녁에 답장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지만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한 때 사랑했고,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이 용기 내어 정성스레 보낸 메시지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는 걸까? 큰 충격을 받았다. 전 연인으로서도 실망했지만 인간적으로도 너무 큰 실망을 했다.
나와 함께 연애하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그 사람이 맞는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긴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시 한번 결혼 준비 시작 전에 헤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잠수이별을 당했을 때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 남자는 복이 없는 남자야!
너같이 괜찮은 여자를 스스로 놓쳤잖아.
엄마 말이 맞다. 나같이 괜찮은 여자를 두고 도망친 그는 복이 없는 남자이다. 그리고 나는 이토록 책임감 없는 남자가 알아서 떠나 줬으니 복 있는 여자가 맞는 것 같다. 도망친 사람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나 혼자 이 책의 마침표를 찍겠다.
그동안 즐거웠다. 잘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