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하고 또렷한 기억으로

by KarenB

분명하고 또렷한 기억으로 무한히 '존재'하는 것.




J와 래시가드를 맞춰 입고 꽝시 폭포 앞에 모자를 쓴 우리는 마치 악동 같았다. 폭포가 떨어져 포말을 일으키는 물속으로 손을 넣은 나와 꽝시의 물속에 몸을 숨긴 채 연신 "가고 싶지 않아"라고 했던 J가 사랑스럽다. 통통배를 타고 땃새 폭포로 가는 풍경이 더불어 우리의 표정이 선하고 아름답다. 선녀와 나무꾼이 튀어나올 거 같은 풍경 안에서 책을 보고 맥주를 마셨던 느린 오후와 서로의 곁이 따뜻했다.


꽝시 폭포로 몸을 던진 순간 밀려오던 상쾌한 행복감에 J에게 "너도 해봐"- 결연하게 "싫어" 했던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의 울림까지 기억난다. 종일 소변을 참다가 한계에 부딪힌 채 달려갔던 꽝시의 화장실을 두 눈으로 확인했던 끔찍함과 나와는 달리 숙소로 돌아가기 전까지 소변을 참았던 J의 노랗게 뜬 안쓰러운 흰자까지 떠오른다.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와는 달리 루앙에서 우리의 두 번째 숙소는 제법 큰 수영장이 딸린 근사한 호텔이었다. 윤기가 도는 단정한 머리 모양을 하고 동글동글한 눈매를 가진 호텔 직원이 N을 통해 미리 값을 지불한 호텔비를 또 내라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한국말을 그대로 직역한 짧은 영어로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N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가 단단히 난 N의 전화를 건네받은 호텔 직원의 눈이 점점 동그래 지고 점차 표정이 굳어가며 급기야 귀에 붙은 핸드폰이 서서히 떨어지는 손의 움직임까지 꼼꼼히 지켜봤다. 휴대폰을 뚫고 나오던 N의 대포 같은 고함 소리를 두고 J와 나는 심심하면 떠들었다.




한낮의 루앙의 모습처럼 고요한 것은 없다. 나는 살면서 그런 고요를 본 적이 없었다. 여행자들은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한적한 카페에 들어가 내내 시간을 보낸다. 또는,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거나. 게스트 하우스를 끼고 있는 카페에 들어가 비어 라오 한 병을 시켜 놓고 찌는 듯한 태양 아래 노곤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흐르는 게 시간인지, 나인지... 모를 지경이다.


한 낮엔 종일 게으름을 피우다 밤이 되면 돌연 활기를 띠고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루앙프라방은 해가 까맣게 지고 나면 느릿느릿 걸었던 그 길 위로 빨간 지붕이 일렬로 가지런하다. 라오스 소수 민족들이 만들어 파는 옷과 가방, 갖가지의 소품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J와 나는 꽤나 긴 줄을 따라 마치, 야시장은 처음인 사람처럼 신이 나서 걸었다. 빨간 지붕이 하나 둘... 사라질 때까지 여기부터 저기까지 몇 번을 오고 갔는지. 무릎이 아파져도 배가 고파와도, 아프고 고픈 줄 모르고 걸었다. 킵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마치 그것이 재미라도 되는 양 흥정을 하며 야시장을 휩쓸고 다녔다.

몇 천 원의 돈을 쥐고서 쪼그리고 앉아 미간을 좁혀가며 진지하게 고심하며 쪼리를 고르고 이 옷이 어울릴까, 저 옷이 어울릴까, 저 바지가 이쁜지 저 바지가 이쁜지를 논쟁해 가며 흥분한 채 쇼핑에 몰두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만 킵씩 깎은 바지와 원피스를 담은 까만 봉지가 양손 가득이었다. 더 이상 살 것도 없는데, 바닥에 깔린 물건들을 또다시 처음인 것처럼 만지고 보았던 기억들이 루앙을 이루고 있었다.


빨간 지붕이 사라진 밤거리에 사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느긋함을 유지한 채 한가롭다. 야시장이 사라지고 나니, 허기가 밀려왔다. 만 킵 뷔페엔 이미 자리를 잡은 여행객들이 만원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낯선 여행 동지의 얼굴 식별이 가능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자리에 앉아 J와 나는 의문(?)의 꼬치와 매콤한 쌀국수에 맥주를 곁들여 먹었다.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오늘의 즐거움에 대해 떠들다 잠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를 봤다. 졸고 있는 아이 옆에서 들통에 미처 팔지 못한 꼬치를 담고는 때가 묻은 검은 천으로 덮어 버리는 엄마 모습에 J와 나는 눈을 마주치고 픽- 웃어 버렸다.


야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이 담긴 검은 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루앙의 밤거리를 걸어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왔다. 자정을 넘긴 시각에 야시장에서 구입한 원피스와 바지들을 하나하나 입어보고 서로의 옷맵시에 감탄하다 한국에서는 절대 팔지 않을 거 같은 쪼리를 격하게 마음에 들어 하고 정말이지 루앙의 야시장에서만 팔 거 같은 커다란 구멍이 매력적인 J의 바지를 길바닥 어딘가에 흘려버리고 온 것을 세상 기절할 듯 웃다가 갑자기 억울한 거까지 통틀어 가장 호탕하고 유쾌한 날이었다. 한국이었으면 조용히 하라고 민원이 들어왔을지도 모를 웃음소리가 게스트 하우스 벽을 뚫고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정말이지, 잠들지 못하겠는 밤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에 자전거를 탔다. 하늘은 높고, 파랗고 우뚝 솟은 야자수는 위풍당당하다. 한낮의 태양이 직사광선으로 내리쬐는 한산한 거리를 느리게 걸었다. 수다스럽지 않은 우리가 더 조용해졌다.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J의 뒤를 따라가고, J가 내 뒤를 따라온다. 살갗을 스치는 공기의 바람과 냄새를 느끼며 페달을 밟았다. 작고 아담한 액세서리 가게 앞에 자전거를 세웠다. 정성스럽게 놓인 수공예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마음에 드는 팔찌 하나를 골라서 나왔다. 그날의 냄새가 묻은 팔찌를 차고 목적지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덜렁대며 넘어져 우정 반지가 부러져 징징거리며 또, 좋다고 웃었다. 여름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인 카페에 들어가 망고주스를 마시고 말없이 웃고, 가만히 있기를 즐겼다.


해야만 하고

보아야만 하는

가야만 하고

담아야만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반지가 부러져도

달리다 달리다 바퀴가 향하는 대로 멈추고 느끼고

설탕 맛이 나는 망고주스도

십만킵을 주고 산 팔찌도

잠깐 들어간 카페의 직원마저, 여름의 크리스마스트리도

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놓인 루앙의 모습이 좋아서 문득 슬퍼지기도 했다.

영원한 '맺음'은 없고, 결국엔 시간 앞에 놓인 '끝'은 늘 존재했으니까.


루앙의 그 조용한 거리가

유토피아의 그 더러운 소파가

싸구려 게스트 하우스가

만 킵 뷔페에 놓인 꼬치들이

푸시 산을 오르던 계단이

밋밋했던 레스토랑의 쌀국수가

N의 대포 같은 고함을 깜짝 놀라 듣던 라오인이

꽝시의 세상 최악의 화장실조차

검은 봉지를 들고 세차게 웃으며 배꼽을 잡던 우리가


낱낱이 새겨진 가슴으로 눈물겹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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