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급했다. 루앙의 하늘이 조금씩 붉은 빛깔을 내며 물들어 가고 사위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을 할까, 정도만 정해 놓고 오고 가는 벤 시간을 알아보는 게 전부 인... 우리의 게으른 여행이었다. 꽝시에서 정신없이 놀다, 미리 예약해둔 트럭을 개조한듯한 미니밴에 올랐다. 앞서가는 벤에 앉은 카우보이 모자를 쓴 여행자가 내가 들어 올린 카메라를 향해 완벽한 V를 만들어 웃어 보인다. 푸시산에서 일몰을 보려면 서둘러야 했지만 마주친 눈길에 웃어 보이는 낯선 여행자의 모습에 어떤 동요도 없는 풍경 속에서 급하게 달아오르려고 하는 마음이 나도 모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고 루앙의 거리에 정차했다. 서둘러 내려 푸시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코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J가 뒤따라오는지 잊고 푸시산 정상을 향해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꽤 오른 거 같은데 아직도 한참인 거 같은 의심을 품은 채 "아직도 푸시산 정상이 멀었나요?" 내려오는 사람을 붙잡고 헉헉거리며 물었다. 300개가 넘는 계단의 중간쯤 도달했을 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나 모기가 엄청 물었어 천천히 보고 와. 나 밑에 있을게" 친구를 아래에 두고 아파지는 허벅지 근육을 힘차게 끌어올렸다. 친구 몫까지 꼭 봐야 한다고 중얼거리며 더 힘을 냈다. 발끝이 마지막 계단에 다다랐을 때쯤, 태양은 자신의 색깔을 모조리 뿜어대고 사라진 뒤였다. 아쉬움과 거친 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태양이 사라지고 난 뒤, 푸른빛이 감도는 푸시산 정상에 홀로 섰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헐떡거리던 숨을 멈추고, 일몰의 여운에 젖은 사람들을 지나쳐 푸시산 아래의 루앙을 내려다봤다. 어둠이 깔린 메콩강과 은은한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고, 초록 나무 사이로 빨간 지붕이 나란했다. 부드러운 굴곡을 가진 산자락이 마치 두 팔로 그 작은 집들과 메콩강을 품고 있는 듯한 평화로움이 어둠 속에서 넘실거렸다.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행복했을 난쟁이들이 살 것만 같은... 동화책을 펼치면 그 속에서나 존재할 거 같은 루앙의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 해는 '라오스'를 빼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는 한 해였다. 매일 봤던 J와 내내 라오스 이야기를 하고 그리워하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때였다. "오늘 꿈에는 조마에서 보자"라고 인사할 정도의 것이었다. 유별나게 찍지 못하는 마침표를 두고 떠들다 이내 그리움에 젖어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항공권을 끊었었다. 그런 무모함들이 가능하던 때- 어쩌면 마지막이었을지 모를 청춘의 끝자락을 붙들고 끝나지 않을 거 같은 시절을 붙잡고 살던 때였다. 그리움이 깊어져 무모함이 움틀 때 우리는 지체 없이 라오스행 티켓을 다시 끊었다.
두 번째 라오스 여행이 끝난 시점으로부터 두 달 반이 지났을 무렵 J와 나는 한국의 겨울을 먼발치에 두고 푸시산 계단을 다시 오르고 있었다. 이번엔 함께. 일몰을 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세 번째 라오스 여행에서 J와 함께 바라본 일몰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 번째 티켓을 끊고 왔음에도 그녀와 한 곳을 향해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그날의 지금에- 우리가 또, 라오스에 왔다는 사실이 현실감을 잃어버린 기적같이 느껴져 일몰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꽉 찬 행복감이 밀려왔었다.
크고 거대한 석양빛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부유한 생각들은 한 낱 먼지가 되고 마음이 멍한 채 바라보게 되었다. 일몰의 아름답고 경이로운 감탄은 볼 때마다 매번 새롭게 다시 써졌다. 꺼내지 못한 말들과, 펼치지 못한 마음과, 아물지 못한 가슴에 대한 사사로운 위로를 내가 본 모든 일몰과 석양으로부터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으로부터 받는 '위로'. 그것은 곧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네 인생이 매일같이 행복하면 좋으련만,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질질 끌려가는 듯한 발걸음으로 서있는 모든 이들을 멈추게 하는 힘이 '일몰'에게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무엇을 보고 사는지 조차 모르는 이들을 멈추게 하고 올려다보게 하는 힘. 걸어온 발자국을 건너다보게 하는 힘. 떠나 왔음에도 잠깐 멈췄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잠깐 멈춰서 눈앞에 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좀 보라고 석양은 매번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푸시산을 그득하게 채웠던 사람들은 일제히 석양빛에 매료돼 번지는 빛깔을 경이로운 듯 바라봤다. 각각 다른 사연과 삶을 끌어안고 서있는 여행자들을 향해 석양이 건네었을 그 무엇을 마음에 새겼으리라.
어둠에 압도당하지 않도록 J와 나는 핸드폰 불빛에 의지한 채 살금살금 내려왔다. 그날의 석양을 가득 안고.
평생 떠올릴 만한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