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켜진 가족
엄마는 내가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아쉽게도 나에게 그날은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남아 있다.
이모들을 만나러 나가는 엄마의 밤 외출 모든 순간이 이모들은 아니었다는 걸 종종 엄마가 나를 데리고 나갈 때 보면 이모가 아닌 삼촌일 때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한날은 어느 시골을 갔는데? 그곳엔 딱 보자마자 첫인상부터 좋지 않게 다가오는 할머니와 한눈에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 아이가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엄마의 남자친구인 삼촌에게 아빠라고 불렀고 계속해서 우리 엄마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나 말고 누군가가 우리 엄마에게 그렇게 안겨있고 나 말고 누군가를 우리 엄마가 그렇게 챙겨주고 보살펴 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 싫고 이상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순간엔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눈치껏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옆에 있던 할머니는 더욱 티 나게 우리 엄마가 그 여자아이만을 챙기길 원했기에 나는 더욱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지만 시골을 다녀온 그날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그 삼촌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삼촌은 꽤 잘 살았던 거 같다. 어렸지만 그런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으니-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엄마가 그럼에도 더 이상 그 삼촌과
이어갈 수 없었다는 것은 상대 쪽에서 나를 원하지 않았으리라 합리적으로 의심해 볼 만한 근거 있는 추측이었다.
물론 이유를 따로 엄마에게 묻진 않았지만-
한동안 엄마는 이모를 만난다는 등 어떠한 밤 외출을 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퇴근 후 조금씩 늦어지더니 갑자기 집에 잘 보이지 않던 과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웬 과일이?
과일의 종류가 여러 번 바뀌어 나가던 어느 주말, 오랜만에? 이모를 만나러 가자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나간 곳 맞은편엔
어떤 아저씨가 있었고 그 옆을 자세히 보니 당시 나와 같은 반 여자친구와, 친구의 언니가 서 있는 것이었다.
그 세 명이 보이기 시작하자 엄마는 이모가 아니라 삼촌이라며 말해주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무슨 상황인지 판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닌, 학교에서 만나는 내 친구라니? 황당한 건 사실이었다.
그렇게 오리고깃집에서 모인 다섯 명.
어른 두 명은 빠르게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썼지만 애들 세명은 대놓고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아마 그 두 명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고 나처럼 당하듯 나온 듯 보였다.
그렇지만 애들은 애들, 친구 사이기도 하니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스며들어 셋이 잘 어울려 놀았던 우리. 그 후로 짧은 시간 안에 순식간적으로
가족의 모습으로 비슷한 듯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의 재혼 절대 반대 극구반대! 오빠도 나도
그렇지만 엄마는 이미 재혼으로 마음을 굳혔고 그 마음을
꺾기엔 현실적으로 나도 오빠도 아무런 힘이 없었던 것.
물 흐르듯 빠르게 합쳐진 재혼이었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도 나이 많고 남자인 오빠를 별로 내켜하는 기색도 아니었을뿐더러 오빠 또한 절대 엄마의 뜻을 따를 수 없다는 마음이라 오빠는 당시 같은 반이던 친한 친구네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평생 없어지지 않을 감정들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
엄마에게 커서 물었다.
그때 왜 굳이 굳이 재혼을 선택했냐고 엄마는 말했다.
집이 있어서 그랬다고. 그게 이유가 됐을까? 싶었지만 엄마에겐 큰 부분이었을 것이다. 지하에서 겨우 셋방살이로 올라왔지만 앞날이 희망 따윈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 그곳에서도 여전히 씻는 곳도 밖에 있고 화장실도 멀리 나가야 하니 밤엔 무서워 나갈 수 없어 요광에 소변을 눠야 하는 그런 생활을 해야 했으니 매번 요광에 꽉 찬 소변을 비울 때마다 엄마도 얼마나 지긋지긋했을까-
재혼을 하고 나선 생각지 못한 나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때부터 본격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으리라.
그래서 내 인생이 앞날이 암흑의 길로 칠해지고 있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꼭 그렇지많은 않았다고
생각되는 날이 왔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느끼고 그렇게 느끼니 정말 다행이다.
그런 겪지 않아도 되는 일들을 어쩔 수 없지만 겪어봄으로써 글에 대해 쓸 이야기 주제들도 많고 그 안에서도 나름 경험해 본 것들로 생생하고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으니 그래도 나름 괜찮은 거 아닌가?
제대로 흑수저에서 조금은 올라온 지금까지, 나름 좀 제대로 살아본 것도 맞긴 하니 지금의 행복이 진심으로 와닿고 감사하다는 걸 진실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 오빠가 했던 말이 여전히 귀에 맴돈다.
재혼의 결심을 꺾지 않는 엄마에게 마지막 호소하듯-
엄마, 조금만 버티면 안 돼? 나 곧 성인 되잖아.
나도 같이 일하면 되니까 제발 재혼하지 마.
정말 그랬다면 어땠을까? 나도 여전히 엄마가 그때 재혼하지 않고 힘들지만 , 정말 죽을 듯이 힘들었겠지만 조금만 참고 더 버텨주었다면?이라는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은 뿔뿔이 흩어져 마음까지 산산조각 나진 않았을 거라는 알 수 있는 큰 확신은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재혼가정으로 20년 넘게 살아왔고, 이젠
모두가 성인이 되었고 각자 가정을 꾸려 살아가고 있는 현재
나도 솔직히 가까이 살면서도 엄마를 많이 신경 쓰고 챙겨주지 못하는데 이런 현실에 혼자가 아닌 옆에 새아빠가 있다는 것이 정말 큰 다행으로 느끼며 살고 있다.
재혼가정으로 살아가면서 모든 과정에서 어느 하나 쉬운 것들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마다 때때로 다 달랐겠지만 누구든 가정을 지키려고 다시 일으켜 세워낸 것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손뼉 쳐주고 싶은 어렵고 힘들지만 끝까지 지켜진 가족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인이 했으면서 옆에 누구라도 재혼한다 그러면 도시락 싸들고서라도 말릴 거라던 엄마의 말이 유독 깊게 박히는 날들이 간혹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순간? 아직도 이런 과정들을 적을 때면 호흡이 가빠지고 마음이 불편해지며 나만 잘 살았던 거 같아 친오빠에게 미안해지는 순간들이 합쳐온다. 이런 합쳐진 죄책감은평생 사라지지 않을는지. 참 어렵다
차라리 탓하고 원망만 했던 순간이 나았던 걸까?
제일 미워했던 사람이 왜 그렇게 했는지?! 그 마음과 순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간들을 자꾸 마주하게 되다 보니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용서하고 내 마음이 편해지는 길로 나아가는 걸까? 그럼 우리 오빠는 어떡하고?! 정말 어렵다. 재혼이라는 거, 재혼 가정에서 자라야 했어야 한다는 거.
정말 참으로 어렵다.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