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큰 외숙모, 큰외삼촌
글을 쓰는 순간이 온다면 가장 먼저 진실되고 그리고 깊이
있게 담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 큰 외숙모랑 외삼촌이었다.
항상 나의 글 쓰기 목록의 일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어느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소중한 내 사람들-
이 두 분을 가족으로 만날 수 있었던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였다고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그 정도로 나의 인생 첫 가치관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들어져야 하는 틀이라는 것을 통째로 세워주신 분들이다.
앞에서 살짝 이야기를 썼지만 큰 외삼촌은 우리 엄마의 오빠, 그러니 외숙모는 큰외삼촌의 부인인데, 외삼촌이야 우리 엄마의 오빠니 나에게 잘해줄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외숙모는 나에게 잘해준 의무는? 없음에도 외숙모는 나에게 때론 엄마이상으로 더욱 엄마처럼 나를 보살펴주고 온 마음을 주셨다.
어딜 가든 나를 첫째 딸이라고 말하며 소외받지 않게 해 주었고 말뿐만이 아닌 본인딸들과 더하게도 덜하게도 아닌
똑같이 사랑을 주고 잘못했을 땐 혼도 내주고 모르는 것은 알려주며 그렇게 나를 키워주셨다.
힘든 생활 속 엄마, 오빠를 미워할 수 있는 상황이 올 때면 항상 나를 이해시켜 주었고 스스로 마음을 드려다 볼 수 있게 도와주시며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
내성적이고 매번 소외받는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외숙모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항상 나는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시켜 주는 없어선 안 될 따뜻한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외삼촌 하면 딱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데,
어느 저녁 밤이었다. 갑자기 집으로 전화가 와서 보니 외삼촌의 전화였고 신난 목소리로 나에게 집 밖으로 나와보라고 했다. 뭐지? 하며 나가보니 웃으며 서있던 외삼촌.
나를 보자마자 차에서 어떤 박스를 꺼내며 주는데..
그 안에는 당시 유행하던 운동화에 바퀴가 달린 일명 휠리스 신발이 들어있던 것. 그걸 받은 나는 당연히 좋아서 덩실덩실 신이 났고 바로 꺼내며 굴려서 신어보겠다고 이리저리 하는데 그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간 외삼촌
그때는 마냥 그 선물만 좋았는데 이제 내가 아이를 낳아서
키우면서 보니 그때 외삼촌의 행동에 얼마나 큰 의미와 깊은 진심이 담겨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이제야
본인에게도 자식들이 있는데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조카인 나에게 달려와 그 선물을 주는 것이 과연 꾸며낸 감정과 억지로 짜여낸 마음에서 나올 수 있던 것일까? 절대 아니란 것이다.
그건 본능적인 행동이었고,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먼저 달려온 것이다. 진심으로 내가 기뻐하는 것이 보고 싶었고 내 생각이 제일 먼저 났던 것이란 말이다.
이렇듯 두 분은 진심으로 나를 사랑했고 진심으로 나의 인생 부모가 되어주셨다.
큰 외숙모는 엄마가 절대 알려주지 않는 것들도 말해주었다.
당시 우리 집에선 아빠에 아자도 절대 꺼내면 안 되는 금기어였다. 엄마는 내가 2살 때 이혼했기에 나는 아빠의 얼굴도 몰랐지만 그래도 엄마는 사진은 물론 절대 보여주지 않았고 이름도 나이도 그 어떤 말도 나에게 해주지 않았는데 그걸 외숙모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아빠의 이름, 아빠는 어떤 분이었는지 그래도 아빠는 나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계신다고 만나러 오실 거라며 사진을 같이 보여주었다. 당시 난 외숙모가 말해주던 소중한 아빠의 정보를 잊지 않고자 노력했다. 나도 아빠가 있다는 소중함도 함께
그래서였을까? 친아빠를 처음 만난 순간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리고 끝내 눈물을 흘렸던 엄마의 모습도-
그날은 친오빠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학교로 아빠가 찾아왔고 모르는 아저씨였지만 아빠라는 한마디에 달려가 안겼다. 아빠는 있는 힘껏 안아주었고 나는 혹여라도 떨어질 새랴 아빠의 품에서 내려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아빠와 나의 모습을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 엄마는 계속해서 시선은 앞만 보며 나에게 내려오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강하게 아빠랑 가겠다고 아빠 따라가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려댔다. 그래서 엄마가 눈물을 흘렸던 건가..
결국 아빠의 품에서 내려와야 했고 다시 아빠가 내 눈앞에서 떠나야 했지만 나를 버리고 간다고 생각 들지 않았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온전히 외숙모의 이야기 덕분이었다.
아빠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만나러 올 거라고 했는데 정말 만나러 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영원히 내 옆에서 있을 것만 같던 큰 외숙모, 외삼촌 가족이 미국, 뉴저지로 이민을 갔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고서의 일이었다.
당시엔 두 분의 부재가 나에게 얼마나 큰 후폭풍으로 다가올지 한치의 예상도 하지 못하고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그리고 믿었다. 곧 나도 데리러 오겠다는 그 말을 나도 데려갈 거라는 그 말을-
그러나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고 우린 20년이 넘도록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젠 외숙모와 외삼촌의 기억을 옛것으로만 떠올려야 하고 이렇게 글을 쓰며 그리움을 삭여 본다.
나도 데려가 지-
수없이 힘든 순간 그 마음을 어루만져줄 누군가가 필요할 때면 어김없이 두 분이 떠올랐다. 그리곤 항상 저 말을 원망하듯 중얼거렸다. 나도 좀 데려가지. 같이 데려가지
그랬으면 나 이렇게 불행하지도 힘들지도 않았을 텐데
적어도 내적으로 상처받고 무너지지는 않았을 텐데-
이젠 내 남편과 우리 아이들을 보여주고 싶다.
그렇게 힘든 삶이었고 방황도 많이 하며 외숙모, 외삼촌 보기에 많이 잘나게는 못살았지만 그럼에도 외숙모랑 삼촌에게 떳떳하게 보여줄 수 있는 너무 좋은 가정을 꾸렸다는 것.
거기다 외숙모와 삼촌이 날 보호해 주고 사랑해 줬던 것만큼 날 사랑해 주는 남편이 있고 나와는 달리 너무 밝고 맑고 감사함이 넘치는 아이들이 내 옆에 있다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그럼 분명 엄청 좋아할 텐데, 그렇지 외숙모? 그렇지 외삼촌?
나는 가끔 우리가 만나는 순간을 상상해 봐 -
공항에서 눈이 마주치고 비록 20년 만의 만남일지라도
서로 한눈에 알아본 뒤 어느 누구랄 거 없이 서로에게 달려가는 장면을. 그리고 지난 세월이 담긴 눈물을 펑펑 흘릴 그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