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16] 안개가 걷히고

스마트폰 두고 떠난 스리랑카 여행기: 립톤 싯에서 일출 보기

by 삼콩


“댕댕댕댕!!!”


하푸탈레에서의 첫 아침. 날카로운 자명종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든다. 큰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스마트폰 알람 없이 일어나는 게 무서워 인터넷에 ‘시끄러운 자명종’을 검색해 샀다. 짜증 날 정도로 기능에 충실하다.


밖은 깜깜하다. 립톤 싯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4시에 기상했다. 숙소에서 연결해 준 툭툭 기사님이 5시까지 숙소 앞으로 와 주셨다. 우리는 10분 정도 늦었는데, 따로 연락을 못 했는데도 툭툭 기사는 매우 태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였으면 손님들이 못 일어난 건 아닌지 걱정돼 노크라도 했을 텐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까 싶었다.


기사님은 깜깜한 도로를 30분 정도 달린 뒤 우리를 내려 주었다. 앞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고, 안개도 자욱했다. 공포 영화에 나올법한 풍경이었다. 여기가 관광지가 맞나 싶었다. 툭툭 기사님이 알려준 방향으로 가보니, 누군가 의자에 앉아있는 형상이 어스름히 보였다.


‘귀신인가?’


귀신의 정체는 립톤 할아버지 동상이었다. 립톤싯의 ‘립톤’은 우리가 잘 아는 홍차 브랜드 립톤의 창시자 ‘토마스 립톤’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대규모의 차 농장을 운영했는데, 한 언덕에 앉아 차 농장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다. 립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그 자리에 동상을 세우고 이름을 ‘립톤싯(Lipton seat)’ 이라고 지었다. 립톤이 자주 앉던 자리였다는 점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해발 1,970미터의 고지대에서 하푸탈레의 차밭 전경을 감상할 수 있는 립톤 싯은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귀신이 튀어나와도 놀랍지 않을 으스스한 언덕일 뿐이었다. 조금 올라가니 카페가 있었다.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일출을 기다릴 수 있는 소중한 로컬 카페다.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아직 온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길동물들 비스킷을 나눠 먹으며 일출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주변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희뿌연 수증기 덩어리만 자욱했다. 차밭은커녕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회색 구름뿐이었다.

IMG_2661.JPG 눈물을 훔치며 멋진 일출이라고 쓰기


우리는 각자의 욕망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여행을 준비하며 마음속에 저마다의 그림을 그린다. 이번 스리랑카 여행에서는 유난히 마음속 그림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워하는 순간이 많았다. 스마트폰이 없어 여러 기회를 놓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날씨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스리랑카 정말 이러기야? 그렇지만 실패가 이어지자 점차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에 대해 배우게 됐다. 흐린 날씨는 어쩔 수 없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내 태도는 어쩔 수 있었다. ‘난 정말 운이 없네. 이번 여행은 망했어.’와 ‘그래도 여기까지 와본 게 어디야.’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따뜻한 홍차를 한잔 더 마셨다. 립톤 싯에서 나는 멋진 일출 대신 도를 닦고 있었다. 카페를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툭툭 기사님께 돌아갔다. 못내 아쉬워하는 우리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지, 기사님은 돌아오는 중간중간 경치가 좋은 곳에 우리를 내려 줬다. 신기하게도 정상에서 내려올수록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점 넓어졌다. 언덕 중턱쯤 왔을 때에는 산뜻하고 맑은 하푸탈레의 아침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차밭을 둘러보며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은은한 찻잎 향이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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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차밭을 실컷 즐기고 숙소로 돌아오니 근사한 조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밭을 바라보며 천천히 조식을 먹었다. 스마트폰 알람 소리로부터 자유로운 고요한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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