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15] 기차가 멈춘 날

스마트폰 두고 떠난 스리랑카 여행기: 느와라엘리야를 거쳐 하푸탈레까지

by 삼콩

고장 난 기차에 앉아 한 시간 반을 기다리다 결국 기차에서 내린 우리들. 역 밖으로 나오니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 나타났다. 여행자들이 다니는 도시가 아니어서 그런지 우리를 바라보는 현지인들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근처 툭툭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하푸탈레에 가고 싶어요.”


하푸탈레는 여기서 꽤 떨어진 곳이다. 기사님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하푸탈레요?”


“네, 8,000 루피 어때요?"

“음... 좋아요!”


기차에서 내리기 전 친구의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가격은 9,000루피였다. 1,000루피 적게 부른 가격임에도 툭툭 기사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툭툭에 시동을 거는 그의 표정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큰 건을 잡았기 때문일 거다. 우리도 바가지 쓰지 않아 좋았다.


마을을 벗어나자 아름다운 도로가 펼쳐졌다. 굽이굽이 진 산등성이와 울창한 나무, 차밭, 폭포가 이어졌다. 기차에서 보던 풍경과 비슷했다. 이 구간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 노선이기도 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툭툭 노선이기도 했다. 다만 툭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을 뿐. 앞에는 아름다운 산골짜기 풍경, 뒤에는 시원한 폭포를 두고 자리 잡은 음료 트럭을 지나쳤다. 아, 저기서 홍차 한잔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툭툭 안에서 연신 감탄하며 셔터를 눌렀다. 친절한 툭툭 기사님은 경치가 좋은 곳에서 잠시 툭툭을 세워 주셨다. 우리를 충분히 기다려 주고, 심지어 사진을 찍어 주시기도 했다. 우리가 감사함을 표하자 그가 자긍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메이징 스리랑카.”


우리는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기사님은 우리에게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느와라엘리야에 잠깐 들를까요? 추가금은 내지 않아도 돼요.”


느와라엘리야는 여정을 짤 때 후보에 올랐던 관광 도시다. 아쉽게 일정에서 빠지긴 했지만 영국풍 식민지 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독특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우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툭툭은 느와라엘리야로 향했다.


느와라엘리야는 넓은 인공 호수를 품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영국 식민지풍 건축물이 남아있어 유럽의 어느 지방 소도시에 온 것만 같았다. 도시 전체가 구릉지대와 차밭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는 한가운데에는 넓은 호수가 있다. 호주 주변으로는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어 있어 여유로움을 더한다. 도시의 명소인 빅토리아 공원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다. 공원 한편에서는 말들이 풀을 뜯고 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반짝이는 햇살이 도시 전체를 감싼다.


느와라엘리야는 놓치기 아까운 아름다운 도시였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우리의 목적지인 하푸탈레와 비슷해 보였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 도시는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했다. 하푸탈레가 소박하고 조용한 산악마을이라면, 느와라엘리야는 유럽풍의 고산 휴양지였다. 차분하고 정갈하면서 여유 넘치는 도시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 도시를 여정에 넣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였다. 툭툭 기사님의 호의로 이렇게라도 도시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짧지만 알찼던 느와라엘리야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목적지인 하푸탈레에 도착했다. 해가 뉘엿뉘엿 기우는 시간이었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자 커다란 티팟을 하나 내어주셨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하셨어요. 홍차 한잔 하세요.”


우리는 배낭을 그대로 들고 테라스에 앉아 홍차를 마셨다. 테라스 밖으로 아름다운 하푸탈레의 모습이 펼쳐졌다. 장관이었다. 산등성이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산과 차밭을 두고 구름이 눈앞에서 지나가고 있었다. 고지대 도시여서 그런지 구름이 위가 아닌 앞에서 흘러갔다. 감동적인 일몰이었다. 따뜻한 홍차를 천천히 마시며 일몰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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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유독 길었다. 아침부터 기차를 놓칠까 봐 초조했고 연착한 기차를 하염없이 기다릴 때는 지루했다. 여섯 시간 내내 기차에서 서서 갈까 걱정도 했고, 기차 안에서 스마트폰 밖 아날로그 세상에 대한 통찰도 얻었다, 창밖으로 펼쳐지던 풍경, 기차의 고장,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에서 내리던 우리들, 우연히 만난 툭툭 기사님의 호의, 예상하지 못했던 드라이브 코스와 아름다운 느와라엘리야. 그리고 지금 눈앞으로 그림처럼 지나가는 구름들까지. 예상 밖의 일들로 가득했던 하루였다.


예상 밖에 있는 선물상자를 열기 위해선 예상외의 순간이 꼭 필요하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갈 때 드는 만족감과 안도감이 있지만,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의 즐거움도 있다. 연착한 기차를 기다린 덕분에 일행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기차가 고장 난 덕분에 여정에 없던 느와라엘리야를 둘러볼 수 있었다. 여섯 시간이면 갈 줄 알았던 도시에 도착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긴 하루를 보낸 뒤 아름다운 일몰을 바라보며 마신 홍차는 가장 특별했다.


내일은 또 어떤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날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선물 상자를 열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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