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는 아빠의 나이를 따라잡을 것이다
죽은 자의 시간은 영원히 그곳에 멈춘다.
아빠가 없는 세상은 아빠가 있던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고, 시간은 언제나와 똑같이 흘러간다. 시간은 이처럼 사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달려 나가는 주제에 때로는 인생 그 자체보다 소중한 기억을 마모시켜 버린다. 다 변하고 잊힌다. 그건 다행인 것일까, 저주인 것일까.
5월과 6월에 두 사촌오빠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미 결혼을 한 사촌 언니들은 우리와 나이 차이가 많게는 스무 살가량 났던 반면 이번에 결혼한 두 오빠는 나와 나이가 비슷하고, 같이 컸기 때문에 새삼 격세지감이 들었다. 코앞에 서른을 두고, 아는 선배들의 결혼식을 다니면서도 희미하던 것이 생살로 느껴졌던 것 같다.
이제 우리의 시간이구나. 우리는 이제 정말 어른이구나. '커서 뭐가 될래', 의 '커서'가 '지금'이구나.
그럼 나는 무엇이 된 걸까.
5월 결혼식의 큰삼촌과 큰 숙모도, 이번 6월 결혼식에서의 막내 이모와 막내 이모부도 각각 하객을 맡느라 정신이 없어 보이셨다. 화장과 머리를 하고, 옷을 갖춰 입은 채 긴장된 얼굴로 예식을 진행하는 어른들의 얼굴을 보니 내가 다 울컥하는 기분이라 쉴 새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기쁨과 축하하는 마음 한편으로 이름 붙이기 무서운 감정들이 휘몰아쳤다. 예식장을 가득 채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이들과 즐겁고 행복하고 슬픈 순간들을 함께해 왔다. 하지만 우리 아빠만은 여기 없다.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과도 언젠가 이별하게 될 것이다.
6월의 결혼식에는 미국에 거주하는 둘째 이모와 사촌 언니도 방문했다. 둘째 이모는 내가 초등학교 때 크게 사업을 했었는데, 결국 사업이 실패해 가족 대부분이 큰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당시 엄마의 동의 없이 명의를 도용해서 엄마는 본인이 하지도 않는 일 때문에 십 년 넘게 신용불량자로 살아야 했다.
엄마는 채무를 변제하겠다는 이모의 말을 믿었지만, 결국 몇 천에 달하는 그 돈은 아빠의 사후 사망보험금으로 변제되었다. 나는 이모에게 정말 크게 분노했었다. 미국의 빅 회계펌에 다니면서 몇 억도 아니고 몇 천을 대신 변제하지 않는 사촌언니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참으라는 가족들에게도 서운했고, 갚겠다는 그 말을 10년 넘게 믿으며 속을 썩여온 엄마에도 화가 났다.
그래서 아빠 사망 몇 달 후 한국을 찾은 이모의 옆에 앉아 재잘거리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영업을 했던 사람이다. 어딜 가든 사람들을 잘 사귀고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아빠의 죽음 이후 엄마는 말주변이 줄은 수준이 아니라 거의 눌변 수준으로 어휘가 후퇴했었다. 말을 더듬었고 주술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이모 때문에 고생한 그 세월이 무색하게 그 옆에서 말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왜 저래, 속도 없나, 호구 아니야? 어이가 없어 화가 난 채로 엄마 쪽을 쳐다봤다가 가슴이 쿵 떨어졌다. 그때 엄마의 표정은, '엄마'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건 '동생'의 표정이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기 죽은 얼굴로 '화 났어? 미안해. 오랜만에 이모 보니까 좋아서 그랬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세상이 내가 생각하는 인과를 통해 돌아가지 않는 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엄마에게는 어른이 필요했던 거다. 그걸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알고 나서야 이모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다.
미국에 사는 사촌언니를 포함해 둘째 이모의 딸인 두 언니들은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때 잠깐 우리 집에 와서 살았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에게 각별하다고 말했으나 나는 심드렁했다. 9남매나 되는데, 왜 하필 우리 집이었을까 싶다가도 이해가 됐다. 불편하지 않은 이모들은 많았어도 사춘기인 언니들에게 불편하지 않은 이모부는 우리 아빠가 유일했을지도 모른다. 그야 아빠는 그냥 그런 사람이니까. 사람을 좋아하고,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
결혼식 후 뒤풀이에서 나와 동갑인 사촌 N이 내년 5월에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5월에 있던 결혼식에서 우리는 상대 남자를 봤었는데, N과 똑같이 경찰이고 건실하고 다정한 사람을 만나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어린 시절 N과 같은 C시에 살았다. N은 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고, 집안의 모든 어른들이 N을 대견해했지만 우리 엄마, 아빠와는 더욱 각별했다. N의 언니와 N은 사실 나보다 우리 엄마, 아빠와 가까웠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빠가 오빠들이 결혼하는 걸 봤다면 그리고 N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면
정말 정말 기뻐했을 거란 거다.
나는 주기 전에 받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인데 아빠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을 연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받는 사랑도 밑 빠진 항아리로 모두 내보내는 나와 달리 아빠는 사랑이 마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게서 찾아낼 아빠의 좋은 모습이 있을까?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도 좋은 일은, 슬픈 일은, 축하하고, 기뻐하고, 위로할 일들은 수 없이 생겨날 텐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아빠를 떠올릴 수 있을까. 아빠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 생각해보니 조금도 닮지 않은 것 같다.
아빠가 없어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간다. 가족 모두가 제각기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 셋째 이모가 겪었던 고통들, 둘째 이모가 감당해야 했던 실망들, 돌아가셨다는 집안 어른이 암묵적인 금기어가 되었듯 아빠가 언급되는 빈도도 줄고 점점 잊히겠지. 술에 취하면, 아빠의 기일이 다가오면, 사진을 보면 때때로 생각날 수도 있지만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지워질 것이다. 정말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따뜻한 기억으로, 잊고 싶은 실수로, 지독한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겠지.
'OO는 아직 운전을 못 하니? 좋은 사람 만나야 하는데. 이직은 아직 생각 중이니? 엄마는 좀 어때?'
다들 어른이 되어간다. 이제 우리가 '그' '어른'이다. 나는 운전도 못 하고, 결혼 생각도 없고, 아직도 '꿈' 타령을 하고, 엄마랑은 매일 싸우고 상처주는 게 일인데.
나는 아빠 없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어른이다. 세금을 내고, 대출을 받고, 부동산 계약을 하고, 거짓말에 능숙해지고, 사는 것을 살아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설레는 게 사라지고, 건강 검진을 걱정하는 시시한 '어른'. 나와 같이 철없는 꿈을 말하고,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며 목에 핏대를 높이고, 인생이 얼마나 좋은 것들로 가득한지를 얘기할 아빠가 없는 채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시간이 흐른다. 나 같은 미물로서는 어쩌할 도리 없이. 언젠가 나는 아빠의 나이를 따라잡을 것이다.
아빠는 어떤 얼굴로 나를 마중할까? 내 멋대로 큰 나는 아빠와 얼마나 닮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