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없는 우리는 이제 친가 식구가 아니었다
아빠의 발인은 수목장으로 진행되었다. 아빠가 된 흙, 흙이 된 아빠를 맨 손으로 만지며 엄마는 벌벌 떨었다. 그치만 마지막에 엄마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짐하듯 말했다. 아빠가 묻힌 땅을 원 모양으로 빙 두른 친인척, 최측근들을 생각하면 그건 일종의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OO아빠, 잘 가. 미안해. 어머니 걱정도 하지 마. 당신 성에는 안 찰지 몰라도, 내가 최선을 다 할게. 끝까지 책임지고 모실게.
엄마는 할머니 손을 잡고, 지금은 해결해야 하는 복잡한 일이 많으니 내려가 계시라 일렀다. 그리곤 옆에 있는 작은 아빠의 손을 잡았다. 'OO야, 작은 아빠 한 번 안아 드려'하는 말에 작은 아빠께 다가가니 작은 아빠는 몸을 물리셨다. 엄마와 나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셨다. 마음이 상하셨구나. 작은 아빠의 입장에선 그러실 수도 있겠지. 휴가를 내고 우리 집에 묵으며 사후 처리를 돕겠다는 말을 거절했고, 본인과 이혼한 작은엄마께 도리어 도움을 청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앞서 몇 번이고 언급했듯,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 당시로서는 짐작도 하기 어려웠던 - 방대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감정적인 소모를 줄이고 전문적인 도움을 받길 원했다. 작은 아빠께서 서운해하시더라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작은 아빠께서 와 계시면 '집'이 쉴 곳이 되지 못할 것은 당시 우리에게 너무도 자명했다. 당장은 서운하시더라도 우리 입장을 이해해주셨으면 하고 바랐다. 당시 엄마와 나에게는 누구의 마음을 섬세하게 헤아리고 배려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것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인연이 끊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아빠의 49제를 맞아 우리는 할머니댁이 있는 D시를 찾았다. 49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교통사고 운전자는 구속되지 않았고, 아빠의 회사는 멈췄고, 복수의 외도가 드러났고, 연대보증 소송이 드러났고, 사는 집은 빚 처리로 날아갈 상황이었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연달아 얼마나 많은 불행이 닥쳤고 얼마나 괴롭고 미친 날들이 계속되었는지 일일이 짚어가며 설명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런 건 결국에 모두 의미가 없으니까.
할머니가 보내주신 주소의 원불교 교당을 찾으니 할머니의 자매이자 아빠의 이모이신 이모할머니들께서 먼저 와 계셨다. 할머니는 우리를 보더니 표정을 굳히더니 비꼬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바쁘신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바쁘신 분들이 여기까지 와주셨냐는 투였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계시는구나. 할머니는 우리에게 눈을 흘기시곤 자리를 뜨셨다. 나는 할머니에게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본 적도 없고, 그 대상이 나나 엄마가 될 거라고도 생각해 본 적 없다. 나는 반사적으로 엄마 손을 잡았다.
이모할머니들께서는 장례식장에서와는 달리 우리를 떨떠름하게 맞으시며, 그간의 안부와 진행 상황을 물으셨다. 간략히 상황을 설명했으나 믿지 않으시는 눈치였다. '그렇게 큰 사업을 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그렇게 됐는데 '어떻게 남는 것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아. 우리 얘기를 들을 생각도, 믿을 생각도 없구나.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 대부분의 아빠의 거래처나 지인들의 반응도 이러했다. 외삼촌이나 사촌오빠는 '원래 사업하는 사람들은 가진 걸 과장해서 말해야 하기도 한다'고 나를 위로했지만 나는 매번 사람들에게 아빠가 벌인 허풍을 대신 변명하는 기분이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걸 숨기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말하겠는가. 억울함을 풀겠다고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니던 아빠의 자존심을 목 놓아 상하게 해야 할까?
까놓고 보니까 빚만 많고 다 개털이에요. 될 만한 것들도 있었는데, 빛 보기 전에 그렇게 갔어요. 거짓말처럼. 사놨다는 건물도 잔금만 XX 억이 넘어서 못 가져와요. 지금 당장 집 나가야 돼서 길바닥에 내앉게 생겼어요. 차도 없어요. 보험도 직전에 해지해서 하나만 남았어요.
나는 매번 두 선택지 중에 고민했다. 아빠의 체면 따위 생각 않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불어버릴까, 아니면 침묵하고 오해를 사는 것이 아빠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전자가 승리했다. 사람들은 믿지 않았지만. 할머니나 작은 아빠가 아빠의 재산에 대해 어떤 오해를 했든 우리는 떳떳했다. 한정승인 결과를 말해도 믿지 않는다면 그건 우리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와 엄마가 아빠의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친가 식구들을 사후 처리 과정에서 배제했다'는 건, 화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억측이었다. 독차지할 재산도 없었고, 작은 아빠의 도움을 받지 않은 건 죄송하지만 그간의 행적을 돌이켜 봤을 때 오히려 일 처리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49제가 시작되었다. 앉아계신 작은 아빠께 '작은 아빠, 저희 왔어요.' 인사를 드렸는데 시선도 두지 않고 모르는 척으로 일관하셨다. 그즈음에서는 나도 기가 막혀서 더 이상의 어떤 노력도 의미 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와 나는 맨 앞줄에 앉았고 다른 가족들은 우리와 거리를 두고 앉으셨다. 피가 차갑게 식은 채로 생각했다. 대체 무얼 위해 이러는가. 이럴 거면 무엇을 위해 기도를 드리는 것인가. 이런 마음으로 앉아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49제는 원불교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엄마, 아빠, 나 중 그 누구도 원불교에 관심도 적을 두지도 않았으나 우리는 장례부터 49제까지 오직 할머니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그 의식을 따랐다. 앞에서 교무님이 말씀을 하시고, 이후 가족들이 차례로 올라와 불을 올리라고 하셨다. 처음엔 할머니가 불을 붙이셨다. 그렇구나 했다. 그다음엔 작은 아빠 차례셨다. 이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이모할머니부터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불을 붙였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무님께 우리가 배우자와 자녀인데, 왜 우리는 배제된 것이냐고 물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물었고, 교무님께서는 당황하시며 유족인 줄 몰랐다고 말씀하셨다. 엄마는 드물게 흥분해서 제가 배우자고, 얘가 딸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우리를 소개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불을 올렸다. 직계 가족인데, 얼굴도 모르는 아무개들이 다 지나간 후에야 불을 올릴 수 있었다. 이건 너무 유치한 것 아닌가?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제사를 마친 후 교무님께 오늘 치른 의식의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교무님은 그러시겠냐며 우리에게 계좌를 일러주셨다. 배우자고, 딸인걸 몰랐다고도 다시 언급하셨다. 애써 침착한 척 말을 아꼈으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장례식 비용도, 장례식 중 치렀던 원불교식 제사 비용도, 49제 비용도 내 통장에 있는 내 돈으로, 어려서부터 저축해 온 통장에 있는 돈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대체 나와 엄마가 어떤 재산을 은폐하고 어떤 수혜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거지?
밖으로 나와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려고 하니 작은 아빠가 과시하듯 끼어들어 우리 앞에서 이모할머니들께 농담을 걸고 넉살 좋게 포옹을 나눴다. 너무나 '나 보란 듯'한 행위이고, 작은엄마께서 예견하셨던 태도라 그 미성숙함에 화는커녕 안쓰러움까지 느껴졌다. 작은 아빠는 끝까지 나나 엄마의 인사를 무시하고 뒤를 도셨다. 지기 싫어 나도 고집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히 가세요. 조심히 가세요.' 지금 단단히 잘못 생각하고 계세요. 저희에게 이러시면 안 되는 거예요.
엄마는 이모할머니들께 인사드리고, 우리를 외면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어머니, 저희한테 이러시지 마세요. OO아빠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서운한 게 있어도 저희끼리 이러면 안 돼요. 저희끼리 의지해야죠. 저도 엄마, 아빠가 없잖아요...'
그 말과 동시에 할머니가 무너지듯 눈물을 터트리셨다. 둘은 끌어안고 울었고, 이모할머니들과 나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왜 이런 무의미한 감정 소모를 해야 하는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큰 게 사라졌는데, 서로 위로하고 힘이 돼주지는 못할 상황에.
며칠 뒤 엄마와 동네에 있는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가는 길에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시고, 엄마가 잘 지내시느냐, 밥은 드셨느냐 물었다. 할머니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OO엄마야, 서로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너희가 우리에게 한 것이 너무나 큰 상처가 되었다.'
'연락하지 말고 살자.'
엄마는 당황해서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할머니의 태도는 다시 완고해져 있었다. 말씀하시는 내용 자체도 이해가 안 됐다.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외가 식구들과만 의논하고, 할머니나 작은 아빠가 계신 친가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단다. 너무 서운하게 만들고 상처를 줬단다. 당연하지, 그쪽엔 아빠 인생의 원수였던 외삼촌이 있었고 미안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이 가족이지 살아생전 다섯 번도 보지 못한 남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졸업도 채 못한 상황에서 상주가 됐던 나와 넋이 나간 엄마가 대체 그 상황에서 누구를 위로하고 누구를 챙겨야 했단 말인가.
전화를 끊고 엄마는 작은엄마께 전화를 걸었다. 우리야 일 년에 한두 번 명절에 간신히 볼까 말까지만 작은엄마는 D시에 사시며 할머니와 왕래가 잦았고 종교 활동도 같이 하셨기 때문에 할머니의 의중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작은엄마의 생각도 우리와 같았다. 할머니가 이지가 많이 떨어지신 상황에서 가장 의지하던 큰아들이 죽고, 이제 남은 작은 아빠의 일방적인 주장을 일방적으로 믿고 계신 것 같다고 하셨다. 그게 우리에 대한 주관적인 추측이든 오해든 말이다.
작은엄마는 작은 아빠와 이혼 후에도 도의적인 마음으로 때때로 할머니 댁에 방문해 안부를 물으셨다. 그러나 아빠의 일이 있고, 할머니는 작은엄마께도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작은엄마는 이 또한 분명 작은 아빠의 입김일 것이라고 확신하셨으나 오히려 후련하다고 말씀하셨다. 할머니는 작은엄마에게 '나와 엄마가 아빠에게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빠가 외도를 한 것이 아니겠냐고도 말씀하셨다고 했다. 당신께서도 '남자'에 학을 떼어 그 예전 사람으로서도 이혼이라는 어려운 길을 택하셨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며느리보다는 아들 말이 더 믿기 쉽겠지'
엄마는 어머니께서도 평생 봐 온 당신 아들 성질을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답답해하셨다. 작은 아빠께서 할머니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사시기 위해 두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되어야 본인에게 더 이로운 것이 아닌가.
나는 삼 형제 중 막내인 삼촌께 전화를 걸었다. 며칠 전 49제를 다녀왔는데, 그때도 할머니의 말투가 이상하셨고 이제는 아주 우리에게 보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유를 아시냐는 거였다. 삼촌은 말씀하셨다.
'너랑 너네 엄마가 잘못했지. 잘못 많이 했지. 너는, 그래. 사회생활을 안 해봤으니까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겠다. 근데 너네 엄마는 그러면 안 됐지. 너네 엄마가 잘못한 거야.'
이제 '형수님'도 아니었다. '너네 엄마'였다. 아빠가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늘 같은 큰형 앞에서라면 그딴 호칭을 쓸 수 있었을까? 빡이 돌았다. 나는 '아빠의 가족'이기 때문에 노력하고 있는 것인데, 이제 우리는 '가족'이 아니구나.
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우리 엄마가 뭘 잘못했길래 아빠가 바람을 피게 만들었다는 거야?
왜 너네 엄마 소리를 들어가며 비난받고 손가락질받아야 돼?
그렇게 아빠가 소중했으면 왜 장례식장에서 그 누구도 아빠의 외삼촌에게 단 한마디 못했어? 아빠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 당신들도 뒤에선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해놓고.
당신들이 아빠와 아빠의 삶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알아?
형사 재판 중 B(음주운전 가해자, 당사자)가 진술을 번복했다. 장례식 당시 작은 아빠는 나나 엄마에게 언질 없이 일방적으로 B와 통화를 하고 우리에게 B가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좋게 합의하자는 식의 얘기를 꺼내 엄마와 부딪혔었다. 그때 작은 아빠와 B의 통화 녹음본을 제출하려고 작은 아빠와 그나마 대화를 해본 이모부를 통해 작은 아빠에게 연락을 취하니 작은 아빠는 이미 녹음본을 삭제했다고 답했다. 이모부에게도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했단다.
어떻게 이러지? 자기 형이잖아. 이건 형사재판이잖아. 나나 엄마가 B보다 미운 건가?
비명이 나올 지경이었다. 다행히 큰삼촌께서 사본을 가지고 계셨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장례식장에서 상주로서 나선 것이 그렇게나 되바라지게 보였던 걸까? 작은 아빠 대신 조문객들의 명함을 챙기고, 외삼촌께 대든 것이 그렇게나 잘못된 것인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가?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작은 아빠나 삼촌이 우리를 잘라내려고 한들 하등 상관없었다. 우리가 걱정하는 건 할머니였다. 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노후에 믿을 것은 우리 아빠뿐이었는데. 엄마와 작은엄마는 할머니가 이 상황에도 '아빠의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아빠가 약속한 노후'를 안타까워한다고 흉을 봤다. '어떻게 어머니는 아주버님이 그렇게 되신 것보다 집 지어주겠다고 한 약속이 없어진 걸 더 슬퍼하시지?'그러나 나는 할머니가 너무 안타까웠다. 할머니가 너무 밉지만 그래도 할머니에게 효도했던 아빠의 마음을 본능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인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지식 차이'를 말하며 부양에 손톱만큼도 일조하지 않은 남자의 입장을 변명하고, 학자인 생부를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아버지로 모시고 돈을 갖다 바친 아빠의 의중을 짐작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그랬듯, 나의 엄마를 같은 방식으로 상처 입힌 아빠의 속내를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나는 아빠와 엄마가 만나서 생겨난 존재니까. 할머니와 아빠와 엄마의 무의식이 모두 내 안에 있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과 결핍과 좋은 점과 모난 점과 허물어진 것들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바꿔 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손을 붙잡고 우시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래. 자식을 잃은 마음은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고통일 것이다. '내 아들 어떡해', 살아생전 죄스러움에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던 '내 아들'이라는 말을 아빠가 죽고서야 하셨던 할머니'. 아빠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을 내게 대신 주려고 하셨던 걸 비로소 이해했고 그래서 할머니가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 아빠는 내 연락을 받지 않으시고 작은엄마를 통해 연락을 해 볼 수도 없었으니 나는 두 사람의 아들이자 내 사촌동생인 J에게 연락을 하고 D시를 찾았다. 장례식에서 본 것도 몇 년 만이었는데, 내겐 늘 어린애 같았던 J는 부정할 수 없이 훌쩍 큰 채라 어색했다. 누나로서 밥 한번 따로 사준 적도 없는데 둘이서 처음 만나는 자리가 이런 자리라는 게 미안했다. J는 작은엄마를 닮아 똑똑했고 우리 친가 남자들이 다 그렇듯 덩치가 컸다. 아빠가 J를 얼마나 예뻐하고, 자랑스러워했는지는 말로 다 하지 못한다.
난 J와 어색하게 안부를 묻고, 작은엄마께서 우리 집에 자주 왕래해 주셨는데, 아들로서 그걸 이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우리의 상황을 설명하고, J가 중간에서 작은 아빠께 말을 해줘 사이를 중재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작은 아빠가 아니라 할머니가 걱정되어 그렇다는 솔직한 말도 같이 전했다. J도 할머니께서 나를 얼마나 예뻐하셨는지를 알고, 평소의 할머니를 아니 내 이야기가 충격이라고 말했다. 직전 명절에도 뵀는데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언제나와 같으셨다고 했다.
며칠 뒤 한밤 중 J에게 전화가 왔다.
'아빠가 그 얘기는 아예 꺼내지 말래. 그래서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중간에서 말 못 전할 것 같아. 미안해.'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그래도... 우리끼리는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왕래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잔뜩 누나인 척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는 멍한 채 앉아있었다. 정말 잘려나갔구나, 비로소 실감이 됐다.
올해 초, 햇수로 약 3년 만에 삼촌(아빠의 막내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삼촌'이라고 뜨길래 무의식적으로 외삼촌 중 하나로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아빠의 생일 즈음이라 전화를 하셨나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바뀐 장지 주소를 문자로 전달해 드렸었는데, 그것조차 모르셨던 걸 보면 아마 그간 단 한 번도 아빠를 찾아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너네 엄마랑 둘째 형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네?"
"왜 왕래를 안 하게 된 거냐고. 이렇게까지 멀어질 이유가 있었냐?"
"기억 안 나세요?"
"시간이 3년이 지났으니까, 난 다 까먹었어. 기억이 잘 안나."
"네? 그때 말씀 나눈 게 다예요. 장례식장에서 서운하셨다고 하고, 저희가 일 처리하는데 외가 식구들과만 의논해서..."
"겨우 그것 때문이라고? 아닐 텐데. 너는 몰라도 너네 엄마는 알 거야. 겨우 그것 때문은 아닐 텐데."
"그래서 제가 모르는 무언가 있냐고 전화드렸는데 삼촌이 각자 잘 살자고 말씀하셨잖아요."
"너네 엄마는 알 텐데..."
"그럼 직접 전화해 보세요. 작은 아빠 하고는 관련해서 말씀 안 해보셨어요?"
"안 해봤는데. 엄마 번호가 뭔데? 잘 지내시냐?"
"번호는 그대로고요, 잘 못 지내시고 아직 병원도 다니시는데 그래도 잘 지내려고 노력하세요."
"여기도 똑같아. 할머니도 그렇고..."
"..."
그렇게 전화를 끊겼고 바로 엄마에게 보고차 전화를 걸자 엄마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씩씩대다가 간신히 울분을 삭이면서 말했다. 막내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악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이렇게 사람을 열받게 하는 점 때문에 도움을 받지 않은 거라고. 어떻게 그걸 잊어버릴 수 있냐, 본인이 염치가 있으면 어떻게 자신에게 전화를 하겠냐고 했다. 삼촌이 부탁한 대로 엄마의 번호와 아빠가 묻힌 곳을 전달했지만 엄마의 예상처럼 역시 엄마에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삼촌은 '겨우 그런 일'때문에 가족이 분열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겨우 그런 일' 때문에 가족은 분열되었다. 아빠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겨우' '그런 일' 때문에. 삼촌은 그걸 까먹으셨다고 말했지만 누군가의 영혼에는 영구적인 흉터가 남았고 우리는 할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 어딘가가 무너지는 기분이다.
엄마는 우리와 할머니 사이를 갈라놓은 작은 아빠 얘기를 하며, 또 우리를 그렇게 끊어낸 할머니 얘기를 하며 씩씩대다가도 때때로 아빠에게 미안하다며 기가 죽은 얼굴을 했다.
나도 아빠에게 미안하다. 아직도 할머니가 자주 꿈에 나온다. 할머니 집의 TV 위에는 항상 내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을 치우셨을까, 버리셨을까. 밥은 잘 드실까. 두 아들이 병원에는 잘 모시고 다닐까.
아빠에게 미안하다. 만약 이것이 정말 끝이라면 영원히 미안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게 엄마를 상처 입히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존재는 없다. 엄마를 욕보이면서 짊어질 책임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할 만큼 했다... 되바라졌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