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퍼 Jun 04. 2024

피 말리는 소송은 꼬박 3년을 채우고야 끝났다

그때 나는 고작 스물다섯 살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법원이나 소송 같은 단어와는 전혀 연고 없는,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다. 아빠의 일이 있기 전에는 법원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사는 삶의 장르는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다를 거라고 막연하게 상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다. 법원 문이 닳도록 드나들며 내가 마주쳤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주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트에 가면, 관공서에 가면, 회사에 가면 마주치는 그 사람들이 법원에도 똑같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상속인, 즉 엄마와 내게는 민형사를 합쳐 약 8개 정도의 소송이 들어왔었다. 형사는 물론 아빠의 교통사고 건이었고, 민사는 아빠가 대표로 있던 회사의 거래처들에서 연대보증 명목으로 걸어온 소송들이었다. 매일 다른 이유로 진 빠지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돌아가는 길, 나는 집 앞에서 늘 불안한 마음으로 우편함을 살폈다. 두꺼운 우편 봉투,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빽빽한 그것들을 읽으며 좌절하고 절망하고 또 무기력하고 불안했던 하루하루들.


나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몇 살이 된들, 그 누구든 이런 일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없으리라. 그렇지만 나는 고작 스물다섯 살이었다.


아빠가 떠나고 꼬박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올 초, 항소까지 갔던 민사 소송을 마지막으로 나와 엄마의 이름으로 걸려온 모든 소송들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 지난하고 넌더리 나는 시간들을 온전히 글로 옮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건 내 마음의 모퉁이에 먼지처럼 쌓여있는 어느 기억과 마음에 대한 부분적인 기술이다.




상속에는 크게 단순 승인/상속 포기/한정 승인이 있다. 단순 승인과 상속 포기는 그대로 빚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상속받거나, 포기하거나 하나로 비교적 간단하다. 반면 한정 승인의 경우 상속 재산의 범위에서 빚을 변제하는 것으로, 적극 재산이 소극 재산(빚)을 웃돈다면 상속인들에게 유리하지만 소극 재산이 적극 재산을 역전한다면 상속 포기를 하니만 못하게 번거로워진다. 하지만 우리에겐 짧아도 2년은 두고 봐야 할 보험사와의 민사 소송이 있었고, 여기서 판정될 아빠의 과실비율과 일실수입으로 계산되는 합의금 또한 상속재산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한정승인 외의 옵션이 없었다.


지난 회차에서 언급했듯, 우리의 한정 승인은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법률지원센터를 통해 소개받은 모교 선배님이 계신 법무법인을 통해 진행했다. 일반적인 경우, 한정 승인은 굳이 변호사가 아니라 법무사 선에서 끝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우리는 경우가 복잡했기 때문에 신중을 가해야 했다. 


아빠 소유의 소극재산(빚)의 넘버링은 18번까지 늘어나고야 끝났다. 대출금 채무, 신용카드 대금 같은 일반적인 것들도 있었고 공사계약금 반환 채무, 보증채무, 부동산 매매계약상 잔금 지급채무(무려 몇십억에 달했다)같은 특수한 것들도 있었다. 한정 승인을 원하는 상속인들은 상속개시일로부터 3달 내로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아빠가 떠난 후 한정승인 시점까지 우리에게 들어왔던 소송은 총 5건, 그걸 시작으로 엄마와 나는 지난하게 법원을 드나들게 되었다.


처음 법원에 방문한 날, 얼마나 심장이 조여들었는지 기억한다. 죄인처럼 손을 모으고 앉아 몸을 움츠렸던 것도. 


'어깨 펴고 당당하게, 죄지은 거 아니잖아'. 둘째 삼촌께서 언젠가 내게 말씀하셨었다. 그래, 그치만 죄지은 게 아닌데도 그 안에서 나는 잘못한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혼날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사람처럼 늘 기가 죽었다. 그걸 내색하면 내 옆에 앉아 눈치를 보는 엄마를 더 불안하게 만들 것 같아 억지로 태연한 얼굴을 했지만, 대기 의자에 앉아 우리 차례를 기다리는 시간은 늘 고문처럼 괴로웠다. 벽에 붙은 우리의 이름이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한정 승인에 포함해 달라는 요청에는 논쟁의 여지없이 포함되어야 하는 내역이 있는가 하면 다툼의 여지가 있는 건들도 있었다. 때문에 처음 소송이 들어왔을 때 나는 당사자들을 하나하나 만나 먼저 얘기를 주고받길 원했다. 회사 측 일에 대해선 아는 게 없거니와, 상속인들에게 들어온 연대 보증 소송을 상속인이 아닌 회사, 법인에게 돌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때는 우리 사정을 가감 없이 밝히고, 눈물을 보이며 애원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호소 아닌 호소를 하며 눈물을 뽑다가 침대에 누우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오늘 나는 비굴했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 앞에서 비굴한 것인가.


그런 생각들이 사무쳐 잠이 오질 않았다. 영혼 깊이 상처가 났다. 


도의적인 것과 실리적인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당연한 것이니 그 부분에 유감은 없었는데, 그래도 대면으로 혹은 유선으로 고인의 명복에 대해 인사를 나눴던 상대들을 원고로서 법원에서 보게 되는 건 늘 불편했다. 어색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안부를 묻고, 재판 진행, 그러고 나서 다시 점잖게 고개를 까딱이고 헤어진다. 태연한 척 마주하는 대면과는 달리 서면으로는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고 맹렬히 주장한다. 내게는 모두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 이런 건가. 원래 이런 거겠지.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우리에게 들어온 모든 연대보증 건들에 일일이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은 당시 우리에게 너무나 큰 금전적 부담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명백한 유사 판정 사례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주변 지인분의 도움을 받아 서면을 작성하고, 직접 우리 입장을 변호했다. 막상 재판에 가서는 어리바리하느라 한 번으로 끝날 재판을 두세 번 더 끌기도 했다. 필적 감사를 위해 아빠의 수첩을 뒤지다 아빠가 낙서처럼, 일기처럼 남긴 글들에 눈물을 쏟기도 하고 나 스스로의 멍청함에 질려 자괴감에 허덕이기도 했다.


때때로는 소송 디테일을 알기 위해 아빠의 건설회사에서 진행했다는, 또는 진행 중이라는 공사 현장에 방문하기도 했다. 현장에 계신 관리자 분들이 계약이 어쩌고, 이행이 어쩌고 말씀하시는 걸 듣는다고 들었는데 지금 와서는 문장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다. 한 톨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의연한 척 들으면서 나와 엄마가 지금 얼마나 속아 넘어가기 취약한 상황인지가 새삼 실감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맞았다. 아빠의 사후 회사 본부장이 그 정신없는 와중 횡령을 한 것이다. 고소를 했으나 결국 회사 돈은 돌려받지 못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도 나지 않더라.


대학 재학 당시, 교환학생 목적으로 비영어권 유럽에 파견되었을 때 가장 괴로웠던 건 '늘 알아서 똑 부러지게 제 할 일 하는(적어도 그렇게 평가받아온)' 내가 그곳에서 누군가의 선의 없이는 일상을 영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이것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 실감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최대한 현지인들에게 무해하게 행동하고, 관공서 직원들에게 트집 잡히지 않으려 애쓰는 내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 없었다. 마트를 세 번 빙글빙글 돌다가, 작은 목소리로 버터가 어디 있냐고 물으며 이런 사소한 일에도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에 대한 자괴감과 겨우 이깟 일로 스스로를 한심해하는 나에 대한 짜증이 겹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나는 왜 이렇게나 예민하게 태어났을까?


그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이 하는 말은 내게 외국어 내지는 외계어 같았고 나는 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선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내 얼굴이 제대로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무 공격적이어서 그들에게 충분한 연민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연기하는 내가 영악해서 역겨웠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뭘 해내지 못하는 것도 미치게 한심했다. 의연하고 씩씩한 척 네, 네, 대답하고 집에 도착해서는 울면서 녹음해 온 음성을 타이핑하며 모르는 단어의 뜻을 애써 찾았다. 엄마는 내게 모든 걸 맡긴다고 성질을 내고 차가운 이불속에 기어들어 갔다. 


내 휴대폰에 법원 어플이 깔려 있는 것이 소름 끼쳤다. '나의 사건검색' 따위가 즐겨찾기 되어있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급한 불을 끈 후, 우리 선에서 해결되지 않는 대부분의 것들은 전문가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직접 해야 할 일들은 끊임이 없었다. 엄마와 나는 이제 익숙하게 법원 옆 주차장에 차를 대고, 손을 잡은 채 대기 의자에 앉는다. 남는 자리가 거의 없게 빼곡한 사람들이 저마다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 추측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이 시멘트 건물의 묘하게 스산한 공기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다고 잡념을 이어가다 보면 우리의 차례가 되었고, 기다린 시간에 비해 재판은 늘 허무하다시피 빠르게 끝났다. 


나는 그즈음 인턴을 시작했다. 구직 사이트를 통해 헤드헌터가 면접 의사를 물었고, 직무도 업계도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당시의 생활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나 다른 세계에 속하고 싶었다.


그곳에서 네 달쯤 일했을 때, 타 회사의 정규직 포지션에 합격해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엄마와 나는 약을 먹고, 운동을 하고, 또 변론 기일이 잡히면 법원에 가고, 새로 소송이 들어오면 또 얼마간 편집증 환자처럼 굴다가, 또 약을 먹고 잤다. 며칠간 묘하게 고요하다 싶으면 거짓말처럼 새로운 사건이 생겼다. 주말 내내 울고 불고 하다가도 월요일이 되면 회사에 나가 웃으며 일을 했다. 사정을 아는 대표님께 양해를 구해 월차 일자를 조정하고 재판에 출석했다. 그런 일이 몇 번쯤 지난 후에는 많은 것에 초연해졌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엄마가 했던 말이 도움이 됐다.


'OO야. 그냥 아빠가 벌리고 간 일, 아빠가 아빠 돈으로 다 해결하고 가는 거라고 생각하자.'


한정승인을 담당했던 변호사님께 민사 재판을 상담하며 했던 말이 기억났다. 엄마의 노후이자 미래라 이 소송들을 잘 처리하는 것이 무척 절박하고 간절하다고 말했던 나. 매사 불특정 다수에게 애원조로 굴며 내게 있지도 않은 것을 놓칠 까 두려워했던 시간들.


그래. 될 일은 된다. 그럴 일은 벌어진다.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 빈털터리가 된들 죽으란 법은 없겠지. 욕심도 집착도 말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거짓말처럼 편해졌다.




지난 3년, 평화라는 단어가 끼어들라 치면 지난한 소송들은 거짓말처럼 엄마와 나의 일상을 헤집어 놓았다. 일상과 재판은 행복하게 양립할 수 없었고 그걸 생각하다 보면 밥을 먹다가도, 잠에 들려다가도 숨이 막혔다. 소송이란, 오래 지속되는 법률적 다툼이란 시간을 들여 사람을 정성껏 탈곡하는 것이다. 감정도 생각도 남지 않게, 오직 '지친다'는 감각만 지속되도록.


소송 중에는 우리가 뭘 하든 주홍글씨처럼 그것이 딸려오는 것 같았다. 꼬박 3년을 그 부자유로움과 숨 막힘 속에서 살았다. 그 와중에 항소까지 했다, 우리가 원했던 최상의 결과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최악도 아니었다. 더 영리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는 내 최선을 다 했다. 마지막 재판의 결과를 일러주는 변호사와의 통화를 끝내고, 안방으로 건너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이제 우리 재판들 공식적으로 다 종결됐어. 그동안 수고 많았어.'


엄마를 꽉 끌어안으면서 생각했다. 해방이다. 그러나 기쁨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지나왔다, 지나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도 기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건 승리가 아니니까. 여전히 아빠의 과실비율은 45%이고, 지나간 시간은 보상받을 수 없고, 우리의 슬픔과 눈물은 오직 우리만이 기억할 것이다. 그래,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렇게 스물다섯이던 나는 이십 대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이전 16화 아빠가 없는 어버이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