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갚을 것이 많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사람을 죽이는 것도 사람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 또한 사람이다. 나와 엄마가 죽음 냄새가 잔뜩 밴 그 진창을 걸어 나올 수 있게 붙들었던 것도 돌이켜보면 모두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애정과 걱정과 눈물들이 우리를 살렸다.
겨울은 영원할 것처럼 거대해 보여 계절 내내 두렵기만 했다. 그러나 겨우내 꽃이 피지 않는다면 조화라도 구해다 손에 쥐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은엄마는 우리가 중심을 잃고 기울어질 땐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당겨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셨고, 내가 폭발한 후 방에 틀어박힐 땐 힐난하는 대신 따뜻하게 격려하시며 나 스스로 다시 의지를 되찾도록 도와주셨다. 엄마가 겁에 질려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할 땐 현명하게 상황을 짚어 주셨고, 때때로 우리와 깔깔 웃거나 친가 식구들의 흉을 보면서 지옥 속에서도 유머는 유효하다는 걸 알려 주셨다.
나는 작은엄마께 많이 의지했다. 얼마나 의지했냐면, 언젠가 엄마에게 '의지가 안 된다'는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을 때 엄마가 반사적으로 '작은 엄마는 의지가 돼?'하고 욱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작은엄마는 똑똑하시고, 흥분하는 법이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모두에게 예의를 갖추시고, 만사 이성적이며, 진창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강인함을 가진 분이다. 그전까지 우리와 딱히 왕래가 잦은 것도 아니었으나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하실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셨다. 나는 이 시간을 거치며 작은 엄마 마음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작은엄마는 댁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경기에서 자주 세종, 대전까지 왕복하며 우리를 들여다보셨다. 나는 엄마가 죽을 것 같은 순간마다 작은엄마께 전화를 했다. 어느 때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수화기 너머 작은엄마마저 말을 잇지 못하실 때가 있었다. 말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걸 알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묘연할 때였다. 엄마가 작은 엄마에게 유언 같은 말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순간과 순간들을 함께 넘겨주셨다. 누구도 누구의 최악을 함께 겪어 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작은 엄마는 그걸 해 주셨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고, 어떤 감사나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작은엄마는 그렇게 엄마와 나를 몇 번씩이나 구하셨다. 도합 몇 개의 생명을 구하셨다. 나는 맹세했다. 살아생전 작은엄마께 갚지 못한다면, 사촌 동생들에게라도 이걸 갚으면서 살아가겠다고. 꼭 효도하고 갚으며 살겠다고.
내가 기억하는 외가는 늘 시끌벅적했다. 사람도 넘치고, 웃음도 넘친다. 자라고 보니 사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막내 격인 엄마의 딸로, 발에 차이는 2세대 아이들 중 하나로서 외가로부터 특별히 사랑받지도 배제되지도 않고 자라온 내게 외가 방문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중 우리 엄마의 바로 윗 형제인 셋째 삼촌은 내게 크게 가깝다고 느껴지는 삼촌은 아니었다. 지방에 사셨기 때문에 왕래 자체가 적었거니와 아이들이 늘 팔을 잡아당기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졸라댔던 셋째 숙모와는 달리 삼촌은 무뚝뚝하신 편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행사나 명절 때마다 마주치면 인사를 드리고, 간단히 근황을 주고받는 정도였다. 삼촌에게는 스무 명가량의 조카들이 있고, 내게도 스무 명이 넘는 사촌 어른들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빠가 떠난 후 셋째 삼촌은 세종의 삼촌 댁에서 우리 집까지 매 주말 왕복하셨다. 퇴근 후 늦은 시간에 혼자 운전을 하고 오셔서 밤새 어떻게 이 상황을 정리하고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셨다. 아예 우리도 모르는 새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 차량등록을 해두시기까지 할 정도였다. 삼촌은 하루에 몇 번씩 전화를 하셨고, 심지어는 재직 중인 회사 내 변호사나 지인의 지인에게까지 물어 우리 일을 상담하셨다. 많은 사촌 어른분들이 우리 집에 찾아오셨고, 지인을 수소문해 우리를 도와주셨지만 셋째 삼촌은 정말 거의 매주 찾아오신 데다 엄마와 평소 각별하지도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뜻밖이고 감사했다. 내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큰삼촌이, 둘째 삼촌이 나서 도움 주시는 것은 이해가 갔지만 셋째 삼촌이라니.
삼촌이 언젠가 전화를 거셨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연달아 힘든 전화를 다섯 통은 넘게 하고 직전에 둘째 삼촌과도 전화를 마친 터라 정말 온몸의 진이 빠지고 뇌가 녹는 느낌이 뭔지 실감하고 있을 때였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지만 직금 당장 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언젠가 내가 다시 전화를 걸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연결했다. 우는 소리를 숨겨봤지만 삼촌은 알아보셨다.
"OO야, 우냐?"
그 주 주말 또 방문하신 셋째 삼촌이 'OO가 울고 있을까 봐 왔지', 하셨고 엄마와 나는 멋쩍게 웃었다. 당시 우리는 둘만 집에 남겨지는 걸 강박적으로 두려워했다. 때문에 우리 둘이 살아 있는지,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지 확인하는 모든 사람들이 감사할 때였다. 보채거나 다그치지 않고 울지 말라고 하시던 셋째 삼촌의 목소리가 얼마나 사무치던지. 당시엔 낯간지러워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여기부터는 너희의 몫'이라며 등을 돌리지 않고 우리가 숨을 고를 수 있도록 그 시간을 함께해 주신 삼촌이 정말 큰 위로가 됐다.
언젠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엄마 OO삼촌이랑 친했어?', 엄마가 깔깔 웃었다. 셋째 삼촌이 다시 방문하신 날 엄마가 그 말을 웃으며 꺼내자 삼촌이 삼촌 특유의 말투로 별 것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다.
"야, OO야. 그런 게 어딨냐. 내 동생 일인데. 내 조카 일인데. 내 매제 일인데."
삼촌은 독실한 크리스천이시고, 몇 년째 카카오톡 프로필 배경 사진은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이라는 문구다. 누구보다 외가 식구들에게 진심이시고, 가족 행사나 모임을 도맡아 진행하셨다. 가족 카페를 만든 것도, 가족 밴드를 만든 것도 삼촌이시다. 부끄럽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일이 있고 나서야 삼촌을 '셋째 삼촌'이 아니라 우리 '삼촌'처럼 여기게 되었다.
지금 나는, 가족 행사에서 삼촌을 뵐 때마다 삼촌 손을 꼭 잡고 삼촌이 내 '최애 삼촌'이라고 표현한다.
그분은 몇 번이나 우리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아빠에게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너무 좋은 분이셨다고, 대표님 같은 분이 없으셨다고, 정말 은인이셨다고. 장례 내내 안 좋은 얘기만 넘치게 들었지, 모든 것이 얼마나 불행하고 아쉬운지만 들었지 아빠가 본인에게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말해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본인의 경제 사정이 어려울 때 고용주였던 아빠가 도움을 많이 준 것 같았다.
우리가 회사 처리에 대해 걱정하자 그분은 얼굴이 어두워져서 쉽지는 않을 거라고 말했다. 분명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고, 잇속 챙기려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대표님이 정말 좋은 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니 절대 그걸 잊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엄마가 눈이 붉어진 채로 웃으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유효했던 보험 건의 담당자분께 연락이 왔고, 이후 처리 과정을 안내해 주셨다. 그것과 별개로 이전에 아빠를 담당했다는 전 담당자분께서도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연락이 오셨다. 도의적으로 그럴 수 있는 일이지만 번거로우실 텐데도 일부러 전화를 해 주셔서 본인이 도와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알려 주시겠다며 업무 외의 마음을 나눠 주셨다.
처음 이분이 내게 전화를 거셨을 때, 나는 믿어야 할 어른이 누군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괴롭고 흔들리던 때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시 이 분께서 목적 없이 건네는 따뜻한 선의에 내가 수도꼭지처럼 다짜고짜 눈물을 터트렸을 때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우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전화 이후로도 몇 달에 한 번씩 연락을 통해 안부를 물으셨고, 사고가 있고 2년이 지난 생일에도 잊지 않고 연락을 주셨다. 잘 지내시냐는, 생일 축하한다는 연락이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의미의 작은 선물을 드리니 앞으로도 기억하고 기도하겠다는 더 큰 마음으로 갚아주셨다.
인생에서 때때로 마주치는 무조건적인 선의는 그 자체로 기적이다. 선한 어른, 감사할 줄 마음. 내가 받은 유무형의 다정을 세상에 나누어줄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될 수 있길. 그리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가 '줄 수 있는' 사람을 꿈꾸게 한 건 모두 이런 분들 덕분이다.
1. O 선생님
당시 코로나19가 점점 악화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O 선생님과의 상담은 첫 한두 번을 제외하고 유선으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O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 다른 곳에서 근무하기로 하셨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O 선생님은 나와는 남은 회차를 모두 진행하시겠다고 하셨고, 예정된 상담 회차가 끝난 후에도 종종 연락이 오셔서 내가 괜찮은지,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으셨다.
O 선생님은 내가 편하게 이야기할 장소가 되어주셨고, 내 생각이나 느낌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날 지지하는 방식으로 힘이 되어주셨다. 녹초가 된 몸과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괴로워하는 도중 휴대폰에 O 선생님의 전화가 뜨면, 멍하니 휴대폰을 쳐다보며 이 전화를 받기 전의 나와 이 전화 이후의 내가 얼마나 다른 사람일지 가늠해보기도 했다. 상담이 내게 과연 얼마나 유효할까. 나는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한 걸까?
그러나 O 선생님은 진정으로 내가 죽기 바라지 않으셨고, 이 세상에 그것 하나만을 바라고 내게 전화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O 선생님은 상담이 끝난 후 시간이 지나고 새해가 되었을 때도 내게 연락을 주셨다. 새해를 맞이하는 소중한 순간에 나의 생존과 행복을 기원하며 날 생각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가. 내가 피해자로서의 감상에 젖어 감히 그런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만함에 절대 젖지 않길.
감히 바라건대 O 선생님께서 살아가는 동안에 살아남는 것 그 이상의 행복들을 모두 누리시길 기도한다.
2. S 선생님
S 선생님과의 상담은 나의 부정적인 신념과 사고체계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나 스스로 일어날 힘을 찾게 도와주었다. 나는 자살위험군으로 분류되어 시의 도움을 받아 S 선생님과 인연이 닿았고, 처음 상담을 하러 갔을 당시는 돌아가는 상황도, 엄마와의 관계도, 나 자신에 대한 통제도 최악으로 치달을 시기였다. 상담을 하러 가는 길도, 돌아오는 길에서도 죽음만을 생각했다. 후에 S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본인도 내 이야기에 숨이 턱턱 막히셨다고 한다.
S 선생님은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생각들을 끄집어내셨다. 나는 인생 동안 S 선생님과 O 선생님을 포함하여 총 5명 정도의 상담자를 만났는데, 상담자와 내담자의 fit의 관점에서는 내게 가장 적합한 상담가셨던 것 같다. S 선생님은 날 무조건적으로 동정하지도, 격려하지도 않으시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내 오래되고 왜곡된 생각들을 지적하셨다.
딸은 엄마의 인생을 따라가잖아요. 엄마가 불행한데 혼자 행복할 수 없잖아요. <-> 왜 그렇게 생각해요? 어머니와 OO 씨는 독립된 별개의 인격체고, 둘에게는 각자의 인생이 있는 건데요.
저 때문에 아빠가 죽은 것 같아요. 제가 그걸 무의식적으로 바랬기 때문에 벌을 주려고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요. <-> OO 씨는 신이 아니에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어요.
제가 부족하고 이기적이어서 일을 그르친 것 같아요. 제가 실수를 해서 어른들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나 봐요. <->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실수를 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그걸 이해 못 한다면 어른들 잘못이에요.
날 둘러싼 세계가 이렇게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스스로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자문하는 건 사치라고 생각할 때였다. 하지만 내가 믿고 있던 잘못되고 편향된 생각들에 대한 반박을 듣고 그것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진창 속에서도 성장할 수 있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S 선생님과의 상담이 만족스러워 엄마도 센터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등록했고, 실제로 가족상담도 1회 진행했지만 엄마는 S 선생님 앞에서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S 선생님은 내가 툭 치면 적합한 말을 쏟아내는, 스스로의 말을 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준비된 내담자'였다면 엄마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엄마에게는 '자기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됐을 때, 그러고 싶을 때' 다시 찾아오라고 하셨다고 한다.
마지막 상담 날, 이 상담실에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을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의 나날이 여전히 무섭다는 마음을 털어놓았다. S 선생님께서는 본인에게 처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사람으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건 S 선생님께서 나로부터 찾아내신 '자력'이라는 힘이었을 것이다. 결국에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고, 언제든 그 힘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누군가에게,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더 이상 찾지 않도록 이끌어주신 S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위에 서술한 분들 외에도 감사한 분들은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진창에도 꽃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들로부터 배웠다. 갚아야 할 사람을 생각했을 때 생각나는 수많은 이름들이 앞으로의 인생, 내 미래에 긍정적인 이름표를 붙이게 했다.
아빠의 회사 정리와 채무를 정리하는 것을 도맡아 도와주신 큰삼촌, 교통사고 조사와 형사 소송 과정에서 큰 의지가 되어주셨던 둘째 삼촌, 아빠의 사후 갑자기 들어닥친 세금 문제를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 H 삼촌, 반찬을 만들어 보내주신 큰 숙모와 Y, 몇 날이고 내가 괜찮은지 묻고 집까지 달려와 주던 - 지금도 늘 주기적으로 내가 괜찮은지 체크하는 W언니, 내게 연락하는 대신 아파트 우편함에 손수 쓴 편지를 적어두고 간 H, 다짜고짜 전화해도 함께 들어주고 울어준 수많은 친구들,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친절과 선의와 다정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최악의 상황에서도 늘 나를 사랑해 준 우리 엄마,
마지막으로는 포기하지 않고 살아낸, 그리고 아빠를 똑바로 직면하기로 결정한 나 자신에게 고맙다.
이 글의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아빠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움의 말을 건넬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