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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Apr 28. 2024

수치심과 부끄러움 사이

내 호소문은 누구에 대한 '호소'였을까

나는 아빠의 사고 처리 과정에서 총 세 개의 호소문을 작성했었다. 


첫 번째 호소문은 교통사고 조사를 맡은 담당 형사에게 쓴 것으로, 유족이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있는 부분들을 포함해 사고를 보다 치밀히 수사해 주길 읍소하는 글이었다. 두 번째 호소문은 담당 검사에게 음주운전 당사자에 대한 엄벌을 촉구해 달라는 취지로 작성되었고, 세 번째 호소문은 민사 재판 담당 판사에게 사고 상황을 보다 상세히 전달함으로써 과실률을 다시 고려해 달라는 글이었다. 


세 개의 호소문은 서로 비슷하고도 전혀 다른 의미에서 영혼에 상흔을 남겼다. 




첫 번째 호소문


아빠의 교통사고는 여러 면에서 의뭉스러운 것이 많았다.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사고 전후 총 4시간 정도의 휴대폰 통화 기록과 평소 사용하던 태블릿이 초기화되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승자 S 씨와 음주운전 당사자 B 씨와의 모든 카카오톡, 메시지, 통화 기록은 아예 깨끗이 지워진 상태였다. 아빠는 병원 도착과 동시에 중환자실로 이동됐고, 고통이 극심해 바로 마취에 들어갔다가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정황 상 사고 직후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아빠의 휴대폰을 대신 소지하고 있었던 동승자 S 씨가 저지른 일일 확률이 높았다.


S씨는 택시로 이송하는 도중에는 B 씨와 사고 관계에 대해 입을 맞추고, 병원에 도착한 후에는 본인이 관련자가 아니라 목격자라고 진술해 이 사고에서 빠지고자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아는 국회의원을 통해 담당 경찰서에 청탁을 넣었다. (고위 경찰이신 삼촌이 여의도에서 청탁이 들어왔다는 걸 귀띔해 주셨다) 정말 청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담당 형사가 조사했던 내용에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S 씨의 과실치사와 관련된 내용이 쏙 빠져있었다. 당시 B 씨가 진술을 여러번 번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판례, 그리고 대부분의 법조인들의 예측과는 달리 B 씨의 구속 영장도 기각되었다. 도주의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경찰이신 삼촌과 동행하여 담당 형사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점과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요청하는 호소문을 전달했다. 충격적이었던 건 그에게서 유족에 대한 배려나 존중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는 일생이 통째로 뒤흔들리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이라는 것을 당연히 이해한다. 그러나 피곤하고 성가시다는 티를 숨기지 않는 그 사람에게 나는 유난스럽고 성가신 민원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는 호소문을 읽고 나서도 우리의 의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S가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거잖아요?'라는 말로 우리의 주장을 간단히 '생떼'로 만들었다.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가며 엄마와 나의 말을 툭툭 끊는 태도가 계속되자 나는 좀 더 우리를 존중하며 말씀해줬으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자기 태도에 뭐가 문제가 있냐는 형사와 말다툼을 했다.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가 분해서 눈물을 흘리는 나를 구석으로 데려가 저 형사가 악의는 없다, 말투가 저런 것일 뿐이라며 달랬고 엄마는 내가 예민한 상황이라며 나 대신 형사에게 사과했다. 이후 삼촌과 함께 교통관리계장이라는 분을 만났고 그분은 사람 좋게 웃으시며 조금의 의문도 남지 않도록 수사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믿을 수 없었다. 담당 수사관의 태도가 저런데, 본인이 담당한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 대한 태도가 저런데, 어떻게 의문이 남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찰서에 나가려는데 담당 형사가 나를 보고 다가와 아까 자신의 태도가 별로였던 것 같다며 사과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까딱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 길에 삼촌이 '형사가 싸가지가 없네, 그치?' 하고 농담을 하셨다. 나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냥 엄마 손을 잡고 걸었다.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내가 예민했던 걸까? 내가 세상 물정 모르고 유족이랍시고 사람들에게 과한 걸 바라는 걸까? 저 사람은 사실 잘못한 게 없는데, 나를 동정해서 그냥 사과'해' 준 걸까?


그에게 썼던 내 호소문은 비굴하다시피 했다. 우리의 고통을 노골적으로 서술하며 제발, 부디, 억울함 없이 수사해 달라고 빌었다. 그건 아마 누구에게도 두 번 다시 읽히지 않을 것이다. 수치스러웠다. 소름 끼치도록 무력했다. 내가 더없이 한심했다.... 괴로웠다.





두 번째 호소문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합의'를 언급하는 작은 아빠와 큰 소리를 내며 싸웠었다. 엄마와 나로서는 사고에 대한 정확한 경위조차 파악하지 못한 시점에 일방적으로 음주운전 당사자라는 여성과 통화한 후 '나쁜 사람 같지 않으니 좋게 마무리하자'는 작은 아빠의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올 리 없었다. 엄마는 얼마를 주든 합의하지 않을 것이라며 전에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눈이 벌게져서 어떻게 자기 형에게 이럴 수 있냐고 울던 엄마를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초동에서의 밤들을 통해 통상의 음주운전 교통사고 당사자에 대한 처벌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가벼운지 알게 되었다. 변호사들은 무거운 목소리로 일반적인 합의금(3천~5천)을 알려 주었고 한 명도 빠짐 없이 형사 합의를 권했다. 형사 합의를 하든, 하지 않든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으니 그거라도 받으라는 거였다. 


나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울며 웃었다. 엄마가 반 실성했을 때 말한 표현을 빌리자면 이건 정말 '개죽음'이었다. 돈의 무게가 누구에게나 같지 않다는 걸 안다. 돈으로 목숨의 무게를 어떻게 매기겠는가. 그러나 사람이 죽었는데, 앞으로 남아있었을 몇 십 년의 여생과 남은 자들의 평생 어치의 고통이 사회 초년생의 1년 연봉으로 합의된다니. 이것이 무려 '사회적 합의'라니, 웃기지도 않았다.


우리를 더 좌절시켰던 것은 우리가 합의를 해주지 않는다 한들, 구속 영장도 기각된 이상 B 씨 측이 실제로 형을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당시의 앞뒤 정황을 설명해 가며 아빠의 억울함을 호소해 봤자 지인들과의 호의동승이라는 사실만 두고 보자면 우리에게 현저히 불리했다. 엄마와 나의 마음에는 천불이 났다. 다들 비관적으로 전망했지만 우리는 하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합의를 거부했다. B 씨가 처음 제시했던 합의금을 자꾸 번복하며 우리를 시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게 괘씸한 이유도 있었다.


담당 검사를 만나려고 했지만 실패하는 바람에 나는 두 번째 호소문을 작성했다. 구속영장이 기각된 것에 대한 비통함, S 씨의 고의적인 초동 조치 지연으로 인해 골든타임을 놓친 것, B 씨의 말 번복과 고인에 대한 S 씨의 거짓말과 모함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첫 번째 재판 날,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엄마와 나, 우리 측 변호사와 B 씨, B 씨 측 변호사가 출석했다. 판사는 나와 엄마에게 유족이냐고 물었고 재판 말미에는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고 말했다. 수많은 재판을 거친 이후에야 그것이 유족에 대한 배려였다는 것을 이해한다. 나는 담당 형사와 검사에게 쓴 두 개의 호소문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을 했다. 우리가 얼마나 억울하고 비통한지, 그리고 아직도 얼마나 많은 거짓말들이 남아있는지, 죄지은 자들이 엄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는 끝내 흐느꼈다. 


호소문을 쓰면서, 생각하기도 싫은 것들을 억지로 꺼내서 고통스럽게 되새기고 강조하면서 이미 수도 없이 무너졌던 마음인데, 그래도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있다는 게 우스웠다. B 씨는 고개를 숙이고 들었고 그쪽 변호사는 내내 나를 쳐다봤다. 


담당 검사는 재판 중 B 씨가 진술 과정에서 한 거짓말들을 몇 가지 찾아냈다. 유족인 우리조차도 간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총 4명이었던 동승자 중 B 씨의 지인이자 네 번째 동승자는 B 씨가 모두가 말리는 상황에서 음주운전을 고집했다며, 가게 문도 닫고 가겠다는 걸 도저히 말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음주운전 차량에 탑승했다고 진술했다. B 씨와 우리가 카페에서 따로 만난 날, 우리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며 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재판이 끝나고, 조심스럽게 담당 검사에게 다가가 혹시 탄원서를 읽어보았느냐고 물었다. 검사는 그렇다고 답했다. 징역이 얼마나 나오겠냐고, 이미 수많은 변호사들에게 물었던 질문이지만 의미 없는 희망을 품고 물었다. 검사는 예측하는 게 조심스럽긴 하지만 자신은 최대한 무거운 형량을 주장할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내 얘기를 신중히 듣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와 나는 녹초가 된 채 택시에 구겨져 집에 오는 길에 대화했다. 아까 그분이 담당 검사라니 다행이야, 그치. 그러게...


하지만 엄마와 나는 B 씨와 형사 합의를 하게 되었다. 


싫다, 아빠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죽어도 눈 못 감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발악하듯 말했고 속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추슬러 보려는 엄마의 말은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자꾸 끊겼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 형사 합의 죽어도 안 하겠다고 한 건 아니었냐는 내게 엄마가 잔뜩 멘 목으로 말했다. 


엄마도 아빠한테 미안해. 

맘 같아선 합의고 뭐고 하기 싫지. 다시 살려 내라고 드러눕고 싶지. 

그런데, OO야... 우리가 합의를 해도, 안 해도 그 사람은 징역 안 살 확률이 높다잖아. 다들 그러잖아. 

살아야지. 엄마도 죽고 싶은데, 살아야지 어쩌겠니.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떡해.


나는 울었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벌벌 떨면서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당시 우리는 당장 살고 있는 집에서도 쫓겨날 판국이었다. 매일같이 들어오는 소장에 안정제와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생활도 불가했다. 만약 내가 세상에 없었어도 우리 엄마는 합의를 했을까? 만약 엄마가 세상에 없었어도 나는 합의를 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소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저런 일을 당했는데도 가해자랑 합의를 할 생각을 할까 하며 피해자와 유족을 경멸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바로 그런 유족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아빠 미안해.


몇 달 뒤 다음 재판에서 판사가 우리가 형사 합의한 내용을 짧게 언급했다. 검사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우리 쪽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라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웠다.





세 번째 호소문


우리는 마지막 소송이자 가장 오랫동안 우리의 속을 태웠던 민사소송 결과에 항소했다. 첫 법무법인에서 우리에게 소송하지 말고 보험사와 합의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을 때 보험사가 제시했던 과실비율은 40%였다. 우린 그걸 터무니 없다고 거절했고 결국 법무법인을 바꿨다. 우리가 상담한 대부분의 법무법인에서는 재판이 잘 진행될 경우 10~20%, 잘 진행되지 않을 경우 30%의 과실 비율을 예상했다. 대부분의 호의동승 판례도 유사했다. 하지만 우리가 최종적으로 받은 판결문에서 아빠의 과실 비율은 무려 45%였다.


판사는 아빠와 B 씨가 연인이라는 것에 주목했다. 아빠와 B 씨가 외도 관계에 있다는 것 때문에 다른 맥락이나 정황들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항소는 우리 측에서도 리스크가 컸다. 패소할 경우 재판 비용을 우리가 감당해야 했는데 보수적으로 잡아도 3천이었다. 엄마는 그냥 받아들이는 게 어떻겠냐고 했고, 변호사는 항소 시 성공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결정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라고 했다. 나는 엄마를 설득해 항소를 택했다. 해볼 수 있는 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야 나중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세 번째 호소문에서 나는 판사에게 아빠가 중요한 클라이언트인 S 씨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상황과 당시 S 씨와 어울리면서 감정적으로 힘들어했던 모습, 그리고 B 씨가 음주운전을 고집했고 아빠가 그걸 만류하고 택시를 부르려고 했던 정황을 강조했다. 쓰면서도 괴로웠다.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 머릿속으로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한 아빠의 탓도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상황을 편집해야 한다는 것이...


항소 결과가 나왔고 아빠의 과실 비율은 여전히 45%였다. 세상과 사회와 시스템과 법이 정한 아빠의 과실 비율. 하지만 그건 내 마음의 수치와는 다르다. 


그리고 이제 와서 나는 아빠의 잘잘못을 고민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이 글('애도의 자격')을 연재하면서 무엇보다도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로 결심했었다. 그래서 이번 글을 쓰는 게 유독 힘들고 괴로웠다. 관심 없는 이들에게 비굴하게 엎드려 온정을 구할 수밖에 없었던 내 처지가 수치스러웠고, 스스로 경멸하던 '그' 유족이 되어 인생을 빠그라트린 사람과 합의를 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남들이 뭐라고 위로하든 부끄러웠다.


나는 지난 3년을 오로지 내게 유리한 쪽으로 편집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다만 시간이 훨씬 더 많이 흐른 후에는 내가 나 자신에게 조금 덜 가혹하길,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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