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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Mar 31. 2024

엄마가 먼저 정신과에 가자고 말했다

우리 이러다 결국 아빠를 따라 죽을 것 같아

지친 하루를 보내고, 이불도 덮지 못한 채 침대에 겨우 엎어져 있던 늦은 오후. 체감상 하루 오십 번은 울리는 같은 전화가 다시금 징징댔다. 한심하지만 당시의 나는 하루 종일 연달아 걸려오는 전화를 겨우 응대하고, 전화 도중에도 헛구역질을 하고, 끊기가 무섭게 다시 울리는 전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때였다. 노이로제와 압박감으로 심장이 너무 뛰어서 환청이 들리고, 울먹이면서 고개를 돌리면 조용히 침묵하던 엄마에 대한 원망이 차오르던 때.


전화를 건 건 경찰이신 둘째 외삼촌이셨다. 삼촌은 경찰 조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아무래도 전후 관계가 수상하니 니가 청와대에 국민 청원을 올리든, 시사 프로그램에 제보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 시기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내게 입을 모아 '더 하라'고 할 때였다. 사고 전후관계, 민형사 소송, 아빠의 신변정리, 회사 정리, 부동산 문제. 아빠가 떠난 이후 단 하루도 긴장을 풀어본 적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쏟아붓고 있는데도 모두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더 하라는 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 지긋지긋했다. 좋은 뜻에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말을 얹는 사람들은 '생각'으로 도와주는 것이지 정작 '행동'을 하는 건 나였다. 그리고 행동해야 하는 '나'는 이미 용량이 초과되고 소진되어 바닥에 남은 찌꺼기들만 부글부글 끓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루 종일 시달리다 겨우 몸을 뉘었는데, 지금의 내게는 조금의 쉼조차 사치인 것을 확인사살받는 기분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데 하는데 우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비집고 나왔다. 둘째 삼촌은 큰 소리를 내셨다. 삼촌도 안타깝고 답답하셨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을 일러주는 것만이 어른이신 삼촌께서 하실 수 있었던 것이니까.


니가 지금 울 때가 아니야!


전화를 끊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도 내본 적 없던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억억, 막히는 소리를 내며 울다가 어린애처럼 울다가 끝내는 아아악, 악을 지르며 울었다. 누구 하나 마음껏 슬퍼하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게 서러워서 울었다. 여기에 '나'는 없다는 게 여실해 울었다. 힘들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쉽게 의지가 꺾이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울었다. 바로 옆 안방에서, 내 우는 소리를 듣고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엄마가 야속해서 울었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지금 내가 어떤지 같은 건 나와 엄마를 포함해 이 세상 누구에게도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아서 울었다.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원래 잘 울지 않는 애니까. 그렇게 자랐으니까.


내가 여기서 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돼?


세상이 너 그냥 죽으라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면서 우는데 엄마가 안방 문을 열고 내 방으로 건너왔다. 당시 엄마와 나는 서로를 받아줄 여력이 없어 누구도 먼저 말을 건네지 않고 침묵을 택하던 때였다. 엄마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해.'


엄마는 덜덜 떨면서 나를 안았고, 못되고 이기적인 나는 미운 마음이 가시지 않아 차마 엄마를 마주 안지 못했다. 그때, 엄마는 정확히 뭐가 미안했을까? '어른'으로서의 능력 부족? 모든 일을 내게 일임하고 방관한 것? 부모로서 이런 일을 겪게 한 것?... 알 수 없지만.






엄마와 나는 아빠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확히는 우리 곁을 지켜주시던 작은엄마께서 다시 돌아가시고 둘만 남게 되자 기다렸다는 듯 전쟁같이 싸웠다.


그냥 이런 식이었다.


하루는 엄마랑 말다툼을 하는데, 엄마가 날 비웃으면서 내가 작은 아빠를 닮았다고 말했다. 나는 차가운 어조로 엄마는 남에게서 나쁜 것만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받아쳤다. 못 들은 척, TV를 보는 듯하던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갔고, 화장실에 갔나 했지만 1시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와 나의 싸움은 대부분 내가 납득하지 못한 채로, 하지만 엄마가 혹시라도 위험한 짓을 할까 무서워 굽히는 방식으로 흐지부지되곤 한다. 나는 셀 수도 없이 반복된 이 루틴에 다시 한번 절망을 느끼며 안방 화장실 문을 열었다.


엄마는 안방 화장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나와,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일으키려는 나를 몇 번이고 뿌리쳤다.


'너, 그 말은 나보고 죽으라는 말이잖아.'

'지금 나보고 그냥 죽으라는 거잖아.'


곡해와 자해공갈은 엄마의 특기였다. 엄마는 아빠나 나와의 갈등이 깊어지면 그런 식으로 우리를 '징벌'하곤 했다. 차를 끌고 나가 난폭 운전을 하거나, 자살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잠적해 인근 소방서와 경찰서에서 모두 출동한 적도 있었다. 수동적으로 협박하는 버릇을 고쳐야지 싶어서 동조하지 않으려다가도 정말 엄마가 어디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늘 굽히고 들어가는 엔딩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차올랐다. 이 상황에서 나한테 어리광을 부리는 거야?


'왜 말이 그렇게 돼? 내가 언제 죽으라고 했어? 왜 말을 그렇게 마음대로 꼬아 들어?'

'그 말은 죽으라는 말이야. 표현만 다르게 한 거지, 너 나보고 죽으라고 한 말이잖아.'


답이 없는 싸움이 밤새 이어졌다. 나는 엄마가 이런 식으로 말을 왜곡해서 해석하고, 피해망상 환자처럼 나를 도리어 가해자 만드는 게 질렸고, 엄마는 좋은 게 좋은 거다 넘어가는 것 없이 하나하나 따지고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내 태도가 넌더리 났을 것이다. 누구 하나 서로에게 져주지 않고 싸웠다.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서로를 비난했다. 그러다 보면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이 나왔다...... 사소한 다툼이 결국 생의 초기까지 되짚게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아빠의 장례식보다 그날 밤이 우리가 죽음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작은엄마가 떠나시고 며칠 뒤 사촌 동생을 군대에 보낸 셋째 이모가 오셨다. 셋이 나란히 누워 잘 준비를 하다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가 가까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빠의 사고가 있기 얼마 전, 엄마와 이모가 외할아버지의 산소에 갔다 온 얘기도 나왔다.


'그거 진짜였어? 나는 거짓말인 줄 알았지.'


잠시간 침묵하던 엄마는 벌떡 일어나 이모에게 말했다.


'언니, 들었어? 봐봐. 나 얘랑 못 살아. 얘랑 어떻게 살아.'


엄마는 나를 경멸하듯 보며 말했고, 이모는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셨다. 나는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한다. 최소한의 가공과 과장을 거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엄마의 딸로 살아오며 때때로 경험했던 어처구니없고 수치스러운 상황들은 내가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관조하게 만들었다. 거짓말을 한 주제에 도리어 불같이 화를 내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거짓말일 뿐인데 뭐가 나쁘냐고 말하고, 밖에서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좋든 나쁘든 거짓말을 하는 걸 '엄마'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병원에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했는데, 건강에 치명적인 이상이 있는 것처럼 부풀려 친척들에게 나를 엄마의 건강에 관심도 없는 나쁜 딸 만들기. 학교 선생님에게 어처구니없는 문자를 보내 놓고, 대체 무슨 생각이냐며 악쓰는 내게 '내가 미쳤냐'며 화내다가 다음 날 사실이라는 것이 드러나 공개적으로 망신 주기. 셀 수 없다. 당연히 외갓집에 간다는 말도 친구를 만나기 위한 핑계일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원래 아무것도 아닌 일에 거짓말을 하니까.


'엄마 원래 맨날 거짓말하잖아. 거짓말인 줄 알았지.'

'내가 언제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이러는데.'

'말해줘? 그때,.... 그리고 그때...'


말하다 보면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옛날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나는 어릴 때 받은 상처, 엄마가 명백하게 내게 잘못했던 부분에 대해 인정받고 사과받아야 내면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엄마는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까지 잘못했다고 그렇게 따지고 드냐는 식이었다. 엄마는 그때 최선을 다 했다고.


안다. '엄마도 엄마는 처음이니까' 같은 관용구를 차치하고도 뼈저리게 이해한다. 엄마를 인격적으로 이해하니까. 엄마의 약함이나 불완전함을 나처럼 생생히 느끼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엄마가 자신 없어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것들로 말미암아 엄마를 용서하고 이해하는데. 하지만 그런다고 내가 상처받고 이해할 수 없이 학대당했던 기억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엄마는 왜 기억도 안 나는 이야기를 하냐며, 왜 그걸 끌어올리냐며 또 죽겠다고 했다.

나는 죽겠다는 협박 좀 그만하라고, 누구보다 죽고 싶은 건 나라고 했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다.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지 않을까 싶었다.


이모가 떠나셨다. 떠나시는 길에 나를 끌어안고 '엄마에게 잘 하라'고 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어떻게 더 잘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날 죽이고 엄마를 위하면 그게 엄마에게 '잘하는' 걸까?


엄마는 야윈 표정을 하고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모가 엄마에게 OO가 돈을 노리고 너에게 이러는 게 아니냐고 했단다. 엄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확 들었다고. 기가 막혀서 눈물과 웃음이 함께 나왔다. 엄마는 그런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싸우지 말자, OO야. 우리에겐 정말 우리밖에 없잖아, 이제.'


정말로. 우리밖에 없잖아.





학과 교수님께서 연결시켜 주신 교내 상담센터에 가기 위해 오랜만에 학교를 찾았다. 아빠의 일을 차치하고도 오랜만에 오는 학교였다. 늘 학생과 관광객들로 정신없이 붐비던 교정은 코로나 이후 조용해졌고, 졸업식도 온라인으로 대체됐지만 그날따라 학교에는 듬성듬성 사람들이 보였다.


아마 그날이 졸업식이었나 보다. 오프라인 졸업식을 못 하니까 졸업 사진이라도 찍기 위해 학사모를 입고 부모님과 학교를 찾은 졸업생들이었다. 아직 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시린 날씨였지만 그날의 햇빛은 거짓말처럼 눈부셨고 부모님과 학우들의 얼굴에는 선명한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자랑스러움, 뿌듯함, 기대감, 희망. 내게도 있었던, 이번엔 분명 내 차례였던 행복이.


상담을 하러 들어가는 길, 기대감 없이 들어간 상담실에서 역시 무력함만 재확인받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교정을 걷는데 고개를 똑바로 들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부끄러운 게 이상했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사랑했던 학교에서, 입학과 동시에 졸업하는 선배들의 시원섭섭한 눈물을 동경했던 나날들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았다. 수치스럽고 서러웠다.


'OO씨 저에게 화가 났나요?'


처음 뵙는 상담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셨다. 왜 그런 말을 하셨을까,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나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화가 났던 것 같다. 모두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데 혼자 발목에 족쇄가 걸린 채 그걸 지켜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게 뼈저리게 실감 났다.


휴대폰을 꺼내 보니 부재중 전화가 30통이 넘게 찍혀 있었다. 엄마였다. 무슨 일이 있나? 덜컥하기가 무섭게 다시 전화가 울렸다. 나는 우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엄마가 건너편에서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

'무슨 일 있을까 봐, 너 잘못됐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

'......'

'나쁜 생각 했을까 봐...'




죽음이 목전에 있다고 느낀 어느 새벽날마다 무서운 충동이 올라올 것 같으면 나는 몰래 밖이나 베란다로 나가 자살방지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자살예방콜센터 같은 곳이었다. 엉엉 울다가 죄송하다고 말하고 끊는 식이었다. 그곳에서 소개해준 지역 내 정신건강센터를 찾으면서도, 학교 상담센터를 찾을 때와 같은 이유로 기대치가 없었다. 겨우 학부생이지만 나름 전공자의 비극이라면 스스로를 진단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반드시 치유와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절감한다는 것이다.


상담센터는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길에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야 내가 괜찮아질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괜찮은 것'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생각했다. 아빠의 일이 있기 전에도 나는 우울을 감당할 수 없는 날이 많았고, 몇 명의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은 적도 있다. 나는 이미 문제가 있는 사람인데, 과연 아빠의 사고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괜찮아지는' 길일까? 아빠가 세상에 없는데 내가 '괜찮아져도' 되는 걸까? 아빠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자기가 없는 세상에서 멀쩡히 살아가는 내가 밉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내가 너무 나쁜 사람이라서일까?


상담 선생님이 차분하게 나를 맞이하셨다. 내 인생의 다섯, 여섯 번째쯤 되는 상담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내게 간단한 검사 같은 것들을 권하셨고, 나는 그것들을 마치고 무기력하게 앉아있었다. 선생님이 상황을 대충 들으시고, 지금 내게 가장 지배적인 생각이나 느낌이 어떤지 물으셨다.


절망

죽음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선생님도 더 말을 잇지 못하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몹시 추웠던 것을 기억한다. 집으로 가는 길이 더 멀었으면 했던 것도.




엄마가 먼저 정신과에 가보자고 말했다. 충격이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건 나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엄마는 결연하게 말했다.


'감기약 먹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


센터에서 연결해 주신 병원에 갔다. 상담은 여러 번 받아봤지만 병원은 처음이었다. 왜 이전에는 올 생각을 못 했을까. 의식하고 보니 우리 동네만 해도 정신과 병원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병원은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차갑고 사무적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예상외였다. 원장님의 취향이라는 캐릭터 피규어들이 가득했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도 있었다. 우리는 각자 검사를 진행하고, 차례로 상담을 받았다. 따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한 쪽에는 약봉투를 쥐고, 다른 한 쪽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아픈 사람들이고,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는 걸 인정하고 인정받으니 마음이 편했다. 해가 눈부신 오후였다. 교정에서 학사모를 쓴 학우들을 부러워하며 눈을 내리깔던 그 날처럼 눈부신 햇빛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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