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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Mar 10. 2024

시린 서초동의 밤

눈 오는 밤, 엄마와 나는 새빨간 손을 맞잡고 법원 거리를 헤멨다

발인이 끝나고 일주일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집에 들어오는데 우편함에 두툼한 것이 꽂혀있었다.


'내용증명'


이게 무슨 뜻이지? 마음이 덜컥해서 서둘러 봉투를 열어보니 계약서와 소장 등 알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 어지럽게 기술되어 있었다. 골자는 이것이었다. 망자 A가 종합건설법인의 대표자로서 연대보증한 계약내용을 해당 법인이 계속 이행할 가능성이 없으니 상속인인 나와 엄마가 대신 보상하라는 것. 처음 들어온 내용증명 금액은 7천5백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다음 날. 또, 또, 또.... 연대보증을 포함해 한정승인 전까지 총 18개의 채무 목록이 밀려들었다. 그 종류도 다양했다. 연대보증, 국세 체납, 대출금, 보증, 매매계약 잔금 지급 채무.


비유가 아니라, 이때부터 정말 본격적인 정신병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한 시도 쉬지 못했고, 밤에는 불안으로 잠이 들 수 없었다. 엄마와도 크게 부딪혔다. 나는 모든 일을 내게 일임하는 엄마에 대한 원망과 이 모든 상황에 대한 부담감으로 예민해졌고, 엄마 역시 배우자를 잃은 미망인으로서 모든 것이 힘겨웠을 것이다. 슬픔에 빠져있을 겨를도 없이 당장 거리에 내나 앉을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말했다. 


'A대표 어디에 땅 있지 않아요?'

'A대표 건물 계약했을 건데. 거기 사고 나서 엄청 올랐을 거예요.'

'A대표 H상무랑 하는 거, 이번에 PF 승인됐다고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니, 큰 사업을 하던 사람이. 남는 게 하나도 없을 리가...'


알 수 없는 돈들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부유했다. 그건 우리에게 없는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현금 자산은 바닥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돈이라곤 새하얀 종이 위 선명히 기재된 채무뿐이었다. 깔끔하게 상속 포기를 하려고 해도 2년 후 민사 소송이 어떻게 끝날 지 모를 일이었다. 또, 아빠가 매매 계약 후 계약금만 지불한 상태인 작은 건물이 계약 당시와 비교해 호가로 2배가 올랐다며 호들갑을 떠는 말들을 들으니 마음이 복잡했다. 당시 우리가 치러야 할 잔금은 23억 5천이었다. 


아빠에게 건물을 판 기존 건물주는 우리에게 계약을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계약도 상속되는지'의 여부와 별개로 우리에게는 애초에 잔금을 지불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이라 어쩔 수 없이 놓치기 싫었다. 이 상황에 돈을 계산하는 나 자신이 환멸이 나고 징그러웠지만, 적어도 그건 엄마의 노후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빠가 가진 가장 큰 것은 '가능성'이었고, 주인을 잃은 가능성은 다른 주인을 찾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누가 개새끼네, 누가 도둑놈이네 욕을 했다. 나는 그냥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걸 알아내고 증명할 방법도, 되찾을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사망하자마자 사고 조사를 담당한 N시 경찰서에 사고 관련 청탁이 들어왔다고 했다. 고위 경찰이신 삼촌의 말씀으로는 여의도에서 온 청탁이랬다. 그게 국회의원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빠와 가장 가까운 관계였다며, 세상을 떠난 아빠도 접견했던 K중개사와는 개인 채무 청산 문제로 이제 돌이킬 수 없이 틀어져버렸다. 상간녀 O는 K가 아빠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할까 무서워 개인 돈으로 K에게 몇 천만 원을 송금했다.

-아빠의 사후 회사의 본부장이 회사 자금을 횡령했고, 우리는 그를 고소했다. 결국 돌려받지는 못했다. 사과도 당연히 없었다.

-사고 차량에 동승했다 도주한 S는 인간 된 도리를 말하며 울분을 토하는 내게 '지금 원하는 것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 묻더라. S는 아빠의 클라이언트이자 음주운전자 B와 아빠를 소개해준 사람이다. 


정말이지,

돈 앞에서 망자에 대한 도의라는 건 우스울 정도로 의미가 없다.






애초 예상과는 달리 음주운전자 B는 구속되지 않았고, 처음 제시한 형사 합의금도 액수를 낮춰 번복했다. 경찰이신 둘째 삼촌께서 소개해주신 법무법인과의 계약도 파기되었다. B의 보험사가 민사 소송을 진행하는 대신 합의를 하자며 금액을 제시했는데, 터무니없는 금액인데도 이걸 그냥 받아들이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어 복장을 터트리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개인과 개인 간 소송은 영세해서 법무법인 입장에서 수수료가 크지 않기 때문에 힘을 들이지 않는다며 위로했다.


삼촌들은 이제는 내가 직접 민형사 소송을 진행할 변호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니가 얘기하기 편한 사람이어야 한다, OO야', 셋째 삼촌이 말씀하셨다. 민형사뿐만 아니라 한정승인 절차와 수 개의 내용증명(앞으로는 더 감당할 수 없이 들어올)에도 대처해야 했다. 정말, 눈앞이 깜깜했다. '한국 나이 25살, 26살이 뭐가 어린애야?' 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당시의 나는 인턴이나 아르바이트조차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대가리 꽃밭 무지랭이였다. 


한정 승인은 모교의 법률서비스를 통해 소개받은 모교 선배 변호사의 법무법인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나는 불안한 상태로 그곳에 방문해 우리의 사정을 줄줄 설명하고, 어쩌면 좋겠냐고 물었다. 소송이 얽혀있었고, 앞으로 회사 청산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일반적인 한정승인보다 상황이 복잡했다. 실제로 내가 상담한 변호사들도 각각 내용을 어떻게 기재할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해 날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정승인 계약을 체결하고, 민형사 소송이 어떻게 진행될지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관련 서류를 요청하는 선배 변호사께 조금 길게 답장을 보냈다. 아까 말한 우리의 상황과 덧붙여서, 이 일을 매듭짓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또 우리는 앞으로 발생가능한 수많은 변수들에 대처해 줄 수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길 원한다는 말. 답장은 없었다. 당연히 부담이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과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이후 대면으로 뵈었을 때, 그 메시지를 보고 '이걸 내가 맡아도 되나' 하셨다고 했다. 이해했다. 그래서 선배 변호사와는 한정승인 외에 민형사 계약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주신 것을 알기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민형사 담당 변호사를 찾는 여정은 정말 맨땅에 헤딩이었다.


아는 게 이것뿐이라 대학생이 자료조사를 하듯 유사 판례들을 리서치하고 스크랩하며 감을 익혔다. 로톡에 가입해 질문글들을 올리고, 답글을 단 모든 변호사와 통화했다. 유사 사례들을 블로그에 아카이빙 한 법무법인들과도 예약을 잡았다. 아빠 휴대폰에 저장된 변호사들은 지인이라 좀 다를까 싶어 또 일정을 잡았다. 친구들에게도 잘 아는 변호사가 있는지 수소문했다. 동네의 변호사 사무실들도 방문하고, 목사 아버지를 둔 친구의 교회에 다니는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몇 주에 걸쳐 많게는 하루에 서너 명의 변호사 사무실을 다녔다. 스무 명도 넘지 않을까 싶은 변호사들을 만난 것 같다. 나는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너무 많이 반복해서 툭 치면 줄줄 나올 정도로. 나중에는 고통스러운 말을 하면서도 심리적인 타격이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좀 덜 안쓰러워 보이나? 슬픈 표정이라도 지어서 동정심을 자극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너덜너덜하게 마비된 내가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졌다. 


별 별 변호사들이 다 있었다.


-상황 설명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전관 썼네', 하고 당장 움직여야 하니 계약을 서두르고 상담 직원분과 남은 얘기를 진행하라던 변호사

-안쓰러워하다 부동산 계약 등의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눈빛을 바꾸고 수수료를 몇 배 바꿔 부르던 변호사

-자신도 아버지를 여의고 힘들었다며, 수임료도 거의 받지 않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임하겠다던 변호사

-심리적 거리를 두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불편해하던 변호사

-다짜고짜 겁을 주며 무서운 얘기를 하던, 장사꾼 같던 변호사


인간이 다양하니 그들 군상 또한 다양한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서글프고 씁쓸했다. 감정적 위로와 사건 처리를 같이 바라는 건 내 욕심이겠지만. 마음을 바라는 건 내가 아직 어린애라 그런 걸까? 선생님이나 의사에 사람들이 보통 멋대로 환상을 가지고 기대했다가 그것이 깨졌을 때 비난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는 직업인이 아니라 그들을 사람으로 보는 내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민사 소송을 감안하면 2년 이상 지속될 관계였다. 변호사를 선택하는 기준을 인간성이나 이름 있는 로펌이나 수수료처럼 하나의 잣대로만 허투루 볼 수가 없었다. 






시퍼런 겨울이었고, 동시에 시뻘건 겨울이기도 했다.


본가는 경기도. 학교는 서대문구. 서초동도, 법원 거리도 와볼 일이 없는 동네였다. 바닥은 미끄럽고, 눈은 높이 쌓이고, 칼바람이 불고, 인적이 없고, 눈이 오는데도 하나도 포근하지 않고 시리게 추운 밤들이었다. 인생의 가장 추운 겨울. 가장 추운 밤.


우리는 차마 서로를 위로하지도 못한 채로, 입이 얼어 '많이 추워?' 물어보지도 못하는 채로 걸었다. 한 손에는 지도 어플을 켠 휴대폰을 들고 두리번거리던 길치가 나고, 막상 앉아서 하는 얘기는 없지만 그래도 나와 동행했던 게 엄마다. 우리 손은 새빨갛게 얼어있었다. '고생 한 번 안 해본 손'이라며 엄마아빠가 좋아하던 내 손은 그 겨울 내내 나무껍질처럼 거칠고 뻣뻣하게 터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시뻘건 손을 맞잡고 걸었다.

가슴에서는 시뻘건 피가 철철 나고, 시퍼런 슬픔이 회오리쳤다.

걸으면서 눈물이 나기도, 화가 나기도, 이대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아빠에 대해 하루 종일 얘기하면서 정작 '아빠'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내가 끔찍하기도 했다.


엄마는 후에 이 밤들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생에 가장 시리던 서초동의 밤. 그 끔찍했던 추위... 나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소름 끼치는 무력감, 타인의 선의를 구걸하는 나를 발견하는 비참함, 이방인의 감각, 언제 끝날 지 모르는 길 위의 눈을 밟으며 누구도 깨지 못했던 침묵.


어떻게 잊을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돌아와 거실에 함께 누웠다. 엄마는 아빠가 떠난 이후 혼자 잠들지 못했고, 우리는 1년 넘게 TV를 켜두고 거실에서 함께 잠들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도 할 일이 많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내가 '할 일'은 뭘까? 내게 닥친 것들 중 내가 자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건 뭘까? 이 일을 해결하는 건 엄마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되었는데, 내가 이렇게 중대한 일을 처리할 변호사를 분별하고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걸까?


법무법인, 아빠의 사무실, 세무서, 경찰서, 법원, 병원...


나는 그냥 멍청히 앉아서 때때로 사람들이 건네는 동정의 눈길을 받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대화를 가만히 녹음하고 집으로 들어와 그것들을 받아 적으며 뜻을 검색해 보고

남들의 진의를 의심하고 누굴 믿어야 할지 알지 못해 괴로워하고

속이는 대로 속고 멍청하게 사람들 앞에서 분노를 터트리고

울다가 밥을 먹다가 죽고 싶다가 그래도 엄마를 보고 살아야지 싶다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무서웠고, 내가 한심했다. 아빠가 미웠고, 그래서 미안했다. 그런 나날들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셋째 삼촌이 말씀하신 '얘기하기 편한' 변호사이자, 관련 사건 경험도 많은 변호사와 계약했다. 법무법인과 계약했다고 하지 않는 이유는 그 변호사가 기존에 소속되었던 법무법인에서 나와 법률사무소 오픈을 준비하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년간 나를 괴롭히던 많은 것들을 그분께 상담하며 진행했다.


더 공격적으로, 더 의뢰인에게 이득이 가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변호사가 있었을 수도 있다.

더 많은 케이스를 확실하게 우리 쪽에 유리하도록 푸는 변호사가 있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경우의 수 중 이게 '최고'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26살, 길을 잃어 눈 오는 거리를 신경질적으로 둘러보면 우두커니 서서 불안하게 그런 나를 바라보던 엄마의 눈동자. 그런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헛똑똑이. 내 생에서 가장 시리던 서초동의 밤에,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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