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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May 12. 2024

아빠가 없는 어버이날

이제 영영 카네이션을 줄 기회가 없다는 것이, 이제야.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화요일 늦은 밤, 사촌오빠인 H오빠가 서울에서의 일을 끝내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이사 집에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이사한 지 얼마나 됐지?' 하는 물음에 엄마가 3년 됐다고 답하니 오빠가 놀란 얼굴을 했다. 지난달 사촌오빠 J결혼식에서 사실상 3년 만의 왕래였던 셈이다. 


자려고 누워 책을 읽는데 오빠가 노크를 했다.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가는 듯하더니 침대에 앉았다. 서울에 올 일이 많았는데 지난 2년이 본인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어서 차마 우리를 들여다볼 여력이 되지 않았다고, 그런데 지난달 J오빠의 결혼식에서 만난 엄마와 나의 얼굴이 편해 보여서 우리 집에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단다. 오빠는 우리가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한 것에 가책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사실 그럴 의무는 누구에게도 없는 건데도.


지난 3년을 거치며 나는 구태여 모든 것을 들춰내거나 샅샅이 헤집는 것보다 덮어두는 것이 나을 때가 많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집에 자욱이 쌓인 먼지를 쓸어내거나 운동화 끈을 다시 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간 것이 아닌 앞으로의 것에 집중하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되기도 하다는 것도. 나는 그냥 웃었다. 슬프지도 괜찮지도 후련하지도 않은 그냥 웃음이었다. 그 많은 것들을 어떻게 몇 마디의 문장에 담겠는가. 나는 말했다.


"오빠. 죄책감 느끼지 않아도 돼. 다들 각자의 삶이 있는데... 그때 같이 못 있어줬다고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해해."

"너는, 자식아. 너 어릴 때 오빠가 많이 안아주고 예뻐했어. 그거면 됐어. 너는 그런데, 이모랑 이모부가... 나는 이모도 그렇지만, 이모부랑도 많이 애틋했거든. 오빠는 그렇게 생각해. 너희 엄마 성격 상, 네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도 들어. 그런데 오빠는 아무래도.. OO(엄마 이름)가."


엄마랑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같이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큰 이모의 아들딸은 엄마를 이름으로 막 불렀다. 내 또래의 사촌들도 엄마를 귀여워했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았다. 내가 아주 어릴 때, 큰 이모가 내게 말씀하셨다. '너희 엄마가 널 낳아서 어른 노릇을 하는 거지, 어른이라서 널 낳은 게 아니야'. 그게 아이에게 적절한 말이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해했다. 어른들이 엄마를 어떻게 보는지,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내가 어떤 걸 감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런 것들을 더이상 원망하지 않고 아빠의 조화를 주문하고 엄마의 볼을 꼬집게 됐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괜찮았다.


H오빠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다 코 먹은 소리로 내게 '고맙다'라고 말했다. 아직 자기도 안 겪어본 일인데, 그걸 어떻게 견뎠을지 상상이 안 된다더라. 가끔 사람들은 내가 강한 애라, 어릴 때부터 똑 부러졌어서, 혹은 그 일을 거치며 현명하고 단단해졌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은 견딜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냥 또 웃었다.


애써 얘기를 마무리하고, 더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오빠의 눈이 젖은 것 같았다. 그걸 못 본 척하고 읽던 책에 시선을 두었다. 오빠가 '그러니까 나중에 소주 한잔 해', 하며 어깨를 툭 치고 나갔다. 오빠랑, 나랑, 아빠랑. 만약 셋이 술잔을 부딪히는 순간이 있었으면 어땠을까. 아빠가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엄마와 내가 아직 자고 있는 이른 아침 떠났고 우리도 아빠의 장지가 있는 Y시로 출발했다. 어버이날.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늘은 깨끗하고 햇빛은 반짝이고 덥지도 춥지도 않게 화창했다. 가는 동안 엄마가 날씨가 좋다는 말을 스무 번은 더 해서 웃음이 나왔다.


가는 길에 카페에 들러 음료를 테이크아웃 하는 데 엄마가 자기 것은 밀크티로 부탁했다. 왜? 하니 펄이 먹고 싶단다. 엄마, 밀크티에 펄이 디폴트로 들어간 건 공차만 그렇고 버블티가 없는 카페가 더 많아, 하니 시무룩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빠가 카페에서 주로 무슨 음식을 먹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났다. 아빠랑 카페를 안 가본 것도 아닌데, 음식을 포함한 아빠의 대부분의 호오는 대부분 엄마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아빠,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집에 돌아올 때마다 늘 손에 무언갈 들고 있었던 아빠처럼, 이제야 나도 얼마든지 맛있는 걸 사 올 수 있는데.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가 매번 갱신되는 것처럼, 나에게도 아빠의 취향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


공원에 도착해 비석과 나무를 털었다. 사진이 많이 바랬다, 가져가자, 갈아야겠다. 그런 말을 하며 준비한 음식을 상에 올리고 절을 했다. 이번 술은 별빛청하. 일품진로, 화요, 복분자를 돌만큼 돌아 이제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술이나 새로 나온 술을 가져오는 게 낫지 않냐며 샀다. 아빠는 이런 달짝지근한 술은 안 좋아할 것 같지만...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사과니 배니 북어니 이런 것 말고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요즘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음식을 올리는 게 어떻냐고 물었다. 엄마, 탕후루나 젤리 같은 것도 올린대. 엄마는 입을 꾹 닫았다. 그래도 구색을 차리고 싶은 거겠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이곳은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조문객들이 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하다. 언제 오나 늘 깨끗이 관리되어 있고 주차장도 빠듯하다. 이쯤 되면 처음 아빠를 묻었던 장지의 진입로가 막혀 옮겨야 하는 상황이 생겼던 게 다행일 지경이었다. 


"엄마, 엄마랑 나도 저 자리에 묻히게 되겠지? 우리가 다 죽고, 이곳을 다녀가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다 죽으면 저기는 어떻게 될까? 아무리 우리가 평생 관리비를 냈다지만... 아주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

"글쎄? 그다음 사람들이 관리하지 않을까?"

"그냥 밀어버리려나... 슬프다. 하긴 죽은 사람들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도 못할 일이야. 그게 자연의 섭리면 받아들여야지."


엄마와 나는 집으로 오는 길 누가 이 공원을 선택했는지를 두고 입씨름을 했다. 결국 공동의 공인 걸로 하고, 어제 H오빠가 엄마와 아빠에게 미안하다더라는 얘기를 했다. 오빠가 아빠랑 애틋했대, 하니 엄마가 웃으며 아빠는 모두와 애틋했어, 했다. 정말, 모두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가족 중 누굴 두고 말해도 아빠에 대한 얘기가 끝도 없이 나왔다. 툴툴대는 엄마나 까칠한 나와는 달리 아빠는 모두에게 다정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둘째 이모의 둘째 딸인 E언니가 어린 시절 잠깐 우리 집에 머물렀었다는 얘기가 나왔다. 모르는 얘기라, 그럼 아빠는 뭐라고 했냐 했더니 엄마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깔깔 웃었다.


"너네 아빠는 누구든 와 있으면 좋아했지."




이번 어버이날 선물은 돈이다. 지금 직장을 그만둔 상태라 내가 번 돈은 아니고, 공금 통장에서 나온 돈이다. 그러니까 결국 From 아빠 to 엄마라고 할 수 있다. 엄마, 나 어린이날 선물은 뭐 줄 거야? 했더니 엄마가 뭘 갖고 싶냐고 물어서 고민하다가 어부바를 하고 집을 한 바퀴 돌아달라고 했다. 엄마는 날 업었고 깔깔거리며 집 안을 돌다가 수영장 두 바퀴를 돈 것 같다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 어린 시절 어린이날은 늘 화려했다. 이런 것에 돈을 아끼는 법이 없는 아빠 덕분이었다. 아빠에게 업어달랬어도, 아빠가 업어줬을 텐데. 어린이날이 아니어도. 매일매일.


 아빠에게 그동안 내가 줬던 어버이날 선물이 잘 기억이 안 난다. 어렸을 때는 정성 들여 그림을 그리고 편지를 썼고, 머리가 좀 크고 아빠랑 데면데면할 때는 엄마랑 똑같은 걸 샀던 것 같다.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서 카네이션 크기가 좀 커지긴 했지만 대단히 성의 있는 선물은 아니었다. 초등학생 땐가, 아빠 생일인지 어버이날인지 아빠에게 이마트에서 지갑을 사서 선물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오를 중요시하는 아빠가 들 법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빠는 그 지갑이 해질 때까지 들고 다녔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수학여행을 다녀오며 샀던 돌고래 모양 열쇠고리도 늘 차키에 달려있었고, 올리브영에서 산 만 이만 원짜리 비누 카네이션도 늘 방 한편에 있었다. 몇 년을 그랬다.


그래서 아빠 방 안에 들어가면 기분이 이상했다.


아빠 방 벽엔 늘 유치원 졸업식에서 찍은 내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었다. '쟤 성격 장난 아니게 생겼네...' 하는 내 말에도, '넌 어릴 때 못생겼었어'하는 엄마의 말에도 아빠는 늘 발끈하며 우리 OO가 얼마나 똑똑하게 생겼는지, 아빠가 그 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일장 연설을 했다. '왜 저래...' 하며 우리는 웃음을 참았지만 정말 아빠는 나를 기특해하고 예뻐했다. 숨만 쉬어도, 밥만 먹어도, 걸어만 다녀도. 성인이 되자마자 당장 쌍꺼풀 수술을 하라던 엄마와 달리 아빠는 의아한 목소리로 'OO야, 너 눈이 예뻐.' 했고, 나랑 싸우고 엄마에게 내 험담을 하면서도 자기 카카오스토리에는 몰래 내 사진을 올려 자랑했다. 


"난 아빠한테 내 사진을 보낸 적이 없는데? 난 애초에 아빠랑 카톡을 안 했어."

"감히 너에게 달라고는 못하고, 나한테 뜯어갔지."


하하. 아빠, 시간은 흐르고, 많은 것들이 변하고, 모두가 그랬듯 나도 마모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어른들 말이 이해가 되고, 마음이 편해지는 때가 오는데 말이야. 시간이 훌쩍 흘러 이제는 이렇게 웃어넘길 수 있는 순간들에 아빠도 함께 했으면 어땠을까. 얼마나 좋았을까.




아빠에게 제대로 효도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어른들은 나쁜 길 들지 않고 알아서 자기 일 잘하는 게 효도라고 했지만, 그건 그냥 내 인생에 충실했던 거지 엄마, 아빠를 위해 한 일은 아니니까 아무래도 석연찮다. '네가 잘 사는 게 효도'라는 말은 내 양심을 아프게 하고, 허튼 길을 들지 않았다고 한들 딱히 내가 엄마, 아빠 속을 덜 썩인 것도 아닐 거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빠에게 보답할 방법이 영원히 없는 것 같다.


지나온 시간보다,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있는 것 같은데... 영원히 아빠에게는 보여주지 못한다. 내 인생에 남은 날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빠는 거기에 영원히 없고, 살아 있는 아빠에게 더 이상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선물하지 못한다. 성취도 성장도 어느 것 하나 지켜볼 수도 없다. 아빠에게 나는 영원히 입과 방문을 꾹 닫는, 귀여운 구석이 없는 딸에서 멈춰있다. 


처음 화장장에서 H오빠가 내게 '너무 괜찮아 보여서 걱정된다'고 말했었다. 


그건 아무것도 몰라서 했던 말이다. 이제야 내가 빼앗긴 시간과 영원히 보답하지 못할 무한한 사랑이 억울하다.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들이 이제야 사무친다.


이유 없이 산 꽃도, 내 돈으로 벌어 주는 용돈도.

나는 아빠에게 단 한 번도 주지 못했는데.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보는 것, 아빠와 같이 술을 마셔주는 것.

아빠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채로 영영 불효녀로 남았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아빠의 생일이 있는 1월. 어린 아빠에게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서러움만이 선명해지던 온갖 기념일들. '사랑'을 내리는 날들에 홀로 부족했던 '사랑'에 아빠가 느꼈을 슬픔과 외로움.


그러나 내게는 입 벙긋하기도 전에 모든 것을 벅차게 안겨주는 아빠와 함께하는 모든 어린이날에 대한 기억이 있고, 문자 한 통이나 싸구려 조화로 퉁지더라도 언제나 주는 것 이상으로 기뻐해주는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어버이날이 있었다. 1월은 세 가족의 생일이 모두 있어 케이크를 세 번 먹는 날. 저녁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고, 촛불을 불고. 영원히 아빠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아빠가 떠난 후 네 번째 맞는 어버이날, 그게 이제야, 이제야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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