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은 부모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것들을 너무 쉬이 알아본다
연대보증 소송들 중 하나에서 계약서 상의 필적이 아빠의 것이 맞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필적 감정 과정이 있었다. 해당 건은 우리의 경우와 거의 유사한 이전 판례가 있었고, 아빠의 필적이 맞든 아니든 우리 측에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않았었다. 하지만 당시 나의 잘못된 판단으로 불필요하게 재판이 늘어진 상황이라 회사와 재판을 병행했던 나는 유독 심적으로 지쳐있었고, 필적 검증을 거치는 것도 그저 '과정을 위한 과정'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법원에서 지정한 필적 감정사에게 연락을 받은 후 아빠가 생전 사용했던 노트를 훑었다. 필적 감정을 통해 계약서의 필체가 아빠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사실 그것은 유족에게 불리한 것인데, 감정사와 협조하며 성실히 아빠의 필적을 전달하고 있는 내 처지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아빠의 회사와 집에는 두꺼운 노트들이 많았다. 일과 관련된 메모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짧게 끄적인 개인적인 글도 있었다. 엄마가 'OO야, 이거 봐'하고 보여준 낙서에는 우리 둘 다 웃음이 터졌다. 그래, 아빠에겐 이런 엉뚱한 구석도 있었지.
아빠의 방과 머리맡에는 늘 책이 있었다. 아빠는 항상 '읽는 책'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아빠와 함께 서점을 가서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책을 읽다가 두 손 무겁게 책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은 아직도 내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빠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던 나를 늘 기특해했고, 아마 그런 자질은 아빠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빠가 쓴 글이나 아빠의 마음이 적힌 글 같은 것을 읽어본 건 그게 처음이었다.
글은 마음을 담는다. 영혼을 담는다. 그것이 혼자 보는 글이라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적힌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남긴 글이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내겐 그 메모들이 너무 무거웠다. 아빠의 글에는 야망이, 불안이 있었다. 가장의 책임감도 장난기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빠의 진심과 꿈이 있었다.
1. 가슴 저린, 참을 인
아빠의 노트엔 저 한자로 도배된 장이 적어도 몇십 장은 있었다. 처음엔 저 한자가 '忍(참을 인)'이 아닌 줄 알았다. 참을 인은 아빠가 쓴 한자와 약간 다르다. 참을 인은 '刃(칼날 인)'에 '心(마음 심)'을 함께 쓰는데 아빠가 쓴 한자는 '刀(칼 도)'에 '心(마음 심)'이 합쳐진 형태다.
아빠가 떠나고 나서 알게 된 것이지만 아빠에게는 남모를 취미가 하나 있었는데, 단도를 모으는 것이었다. (관련 밴드 활동도 하고, 이니셜을 박아 주문제작한 장식장에 보관했던 걸 보면 나름 본격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자를 저렇게 쓴 이유가 따로 있나 했는데 노트 중간에 '참을 인'이라고 한글로 쓴 부분이 있는 걸 보면 그냥 잘못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참을 인으로 빽빽이 채운 노트를 보자니 마음이 아팠다. 아빠가 짊어져야 했던 생의 무게에 분명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에 대한 부채감, 미래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현재를 끊임없이 희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삶에 대한 연민, 그래도 대표인데 직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자기 방 책상에 앉아 저 한자를 쓰고 또 썼을 아빠에 대한 짠함.
아빠는 언젠가 내게 '나는 열심히 참고 살다 나중에 다 하면 될 줄 알았다. 취미도 여행도. 그런데 그런 '나중'은 없더라.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모든 건 가장 좋은 때가 있는 것 같다'고 한 말을 기억한다. 내가 그때 초등학생 아니면 중학생이었으니 당시 아빠의 나이는 많아봤자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50을 겨우 넘긴 아빠의 노트에는 여전히 참고 미루고 희생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빠가 희생한 건 무얼까. 아빠는 어떤 감정과 순간들을 참아냈을까.
마음속으로, 입 밖으로, 직접 글로 쓴 것은 언령이 되더라. 운명처럼. 행복을 위해 '참는'것을 되뇌는 사람의 인생에는 행복이 아니라 인고(忍苦)가 깃든다는 것을 아빠에게 일러줄 누군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 인생을 믿지 않는다.
인생이 참아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아빠의 낙서
나는 어릴 때 꿈이 없었다. 정확히는 '장래 희망'이 없었던 것 같다. 자기주장도 분명하고,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 사이에서 목소리도 컸지만 'OO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하는 질문에는 늘 머뭇거렸다. '나는 이런 사람이 될 거야/되지 않을 거야'같은 추상적인 관념은 있었지만 그게 특정 직업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연결되진 않았던 것 같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말을 들으면 가수가 될까 했고, 키가 크니 모델을 하면 되겠다는 말엔 그런가 했으나 그나마 미적이다 내가 작은 목소리로 내놓은 대답은 '화가'였다.
나는 대한민국 사교육의 산실이다.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지금까지 안 받아본 사교육이 없다. 초등학교 때는 남들 다니는 영어, 수학, 피아노, 미술은 당연하고 논술, 주산, 컴퓨터 학원까지 다녔다. 한 번에 학원을 4개씩 다니는 건 나에게 특별한 게 아니라 일상이었다. 나는 미술 특화 어린이집을 다녔다. 그것도 모자라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엄마는 유명하다는 옆 동네 미술 학원에 나를 버스 태워 보냈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잔뜩 화가 나 씩씩대면서 내일부터 미술 학원에 가지 말라고 했다. 왜? 엄마는 엄마가 운영하던 미용실에 놀러 온 친구에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글쎄 거기 선생님이 'OO는 그림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드러나요', 라잖아'
그게 왜? 나는 엄마가 그 말에 화가 난 이유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엄마의 친구는 맞장구를 쳤지만 나는 영문을 모르는 채로 엄마 눈치만 봤을 뿐이다. '내 생각'이 뭔데? 그리고 그게 그림에 드러난다고 해도, 그게 왜 엄마가 화가 날 이유가 되어야 하지? 이유는 몰랐으나 어쨌든 나는 동네에 있는 미술학원으로 학원을 옮겼다. 하지만 어느 날 엄마는 또 같은 얘기를 했다.
'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인다잖아. 그림에 다 나타난다잖아. 이번에도 그러네.'
그런데 그게 왜? 나는 이번에는 육성으로 물어봤다. 엄마와 옆에 있던 지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건 안 좋은 뜻이라며,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나를 두고 자기들끼리 흥분한 채 말을 주고받았다. 다시, 나는 눈치만 봤을 뿐이다. 몇 년 뒤에, 사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 그게 안 좋은 뜻이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그걸 왜 모르냐며, '다시 생각해도 열받네'라고 중얼거렸다.
그렇게 나는 그림을 싫어하게 되었다. 더 이상 미술 학원도 다니지 않았다. 사실 재능은 아예 없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당시엔 나름 촉망받는 미술 영재였는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되니 미술 시간이 난감해질 정도가 되었다. 그럼 지금은? 졸라맨 말고 그릴 줄 아는 게 없다. 정확히는 그릴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아빠의 그림을 보고 반가웠다. 스케치북과 색연필, 물감을 사 주던, 보고 그리라며 성인이 들기에도 무거운 자연경관 책을 사다 나르던 아빠가 생각나서. 다들 내 꿈이 화가라고 하면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고 어린 눈에도 그게 보였다. 그러나 아빠는 내가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할 땐 그 꿈을 응원하고 지원했고, 작곡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는 장비를 사주며 '자기 색깔이 분명한 음악인이 제일이다',라는 말을 했었다. 우리는 남들이 속 터져하는 유치하고 낭만적인 것들에 대해 얘기했다.
아빠는 늘 아쉬운 듯 말했다. 'OO 네가 그때 그림을 참 잘 그렸는데'. 아빠는 나의 유일한 지원자였고 팬이었다. 내가 어릴 때 나는 아빠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았고 아빠와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림은 무의식을 반영한다고 한다. 아빠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던 건 무엇이었을까.
나도 아빠가 목격한 나의 꿈들에 대해, 아빠가 저버려야 했던 꿈들에 대해, 이따금 남들 몰래 그려보는 낙서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며 같이 킥킥 웃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빠, 나도 사실 그림 그리는 게 좋았어.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일기장 검사 하면서 나한테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OO는 글에 자기 생각이 드러나네. 무슨 생각으로 글을 썼는지가 보여.'
나는 그냥 이런 앤가 봐.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
3. 술 취한 아빠의 일기
오늘
좋은 기억이 있네요
대리 운전을 했는데
제가 4번째 만남이라네요
하시는 말씀이
생각해보니 기억이 잘 안나지만 (꿈처럼)
매사에 긍정적이고 저를 업해주시더라구요
요근래
다운되어 있던 제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더 용기 내고
의기소침하지 말고
잘해보자 하고 화이팅 합니다
아자아자
잘해보자
넌 잘할 수 있어
이 글이 남아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아빠가 드러나는 글이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에 치이고, 그런 하루하루 속에서도 누군가의 선의와 좋은 점을 금방 알아보고, 그 죽일 놈의 꿈과 희망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지키고, 미련할 정도로 '긍정'을 긍정했던 사람.
아빠를 힘들게 한 것들에 대해서 조용히 짐작할 뿐이다. 나는 아빠와 많이 닮았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참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각자가 가진 보물 같은 장점들이 많았다. 그중 부모로서 제일은 두 사람 다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것,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을 내게 주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엄마와 아빠는 자신이 겪은 슬픔과 불행을 내게 대물림 하거나 나를 본인의 소유물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소중한 이에게 자신의 최악을 감당하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최선을 내주고자 하는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귀한 자질이다. 그런 좋은 사람들의 딸로 자라면서 그들이 가진 고유한 장점보다는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슬퍼하던 감정들을 더 직접적으로 물려받았다는 것은 일면 참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 자식들은 너무나도 쉽게 부모의 슬픔을 알아본다. 그들의 불안을 그대로 알아본다. 지식적으로 알지 못해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들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말 그대로 세계였던 시절을 지나 진짜 세상에 던져진 후에도 언제나 첫 세계는 척도이자 집으로서 영원히 내 안에 존재한다.
나는 아빠를 너무나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경험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선험적이다.
그러니 아마 이 고통은 내가 살아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감정 결과 계약서 내의 필적은 아빠의 것으로 추측된다는 감정서가 법원으로 도착했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소송 결과는 우리 측의 승소로 끝났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필적 감정은 과정을 위한 과정이 맞았다.
그러나 아빠의 필적을 들여다보면서 생각난 기억이 있다.
내가 처음 따라한 '글씨체'는 아빠의 필적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또래 여자아이들이 동글동글한 글씨체를 귀엽다고 생각하며 부러 동그라미와 네모를 크게 쓸 때, 혼자 아저씨 같은 궁서체를 연습했다. 배를 깔고 누워 아빠의 필체를 따라 쓰던 때가 생각난다. 왜 그랬을까? 아빠는 일 때문에 집에 잘 없었고, 아빠의 글씨를 따라하다 보면 아빠와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으니까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빠가 어린 내게 'OO는 아빠랑 글씨체가 비슷하네'라고 말했을 때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걔가 따라 연습하더라'라고 한 것 같기도 하다. 아빠는 그 말에도 크게 웃으면서 기뻐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필체도 또래 아이들을 따라 평범한 '여자애 글씨체'가 됐지만, 어쨌든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필체는 궁서체였다. 아빠를 닮은, 아빠를 따라한.
글은 영혼을 담는다. 살아오면서 참 많은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아빠에게 마지막으로 써준 손글씨는 대학교 재학 시절 휘갈겨 썼던 어버이날 카드가 마지막인 것 같다. 아빠는 그걸 몇 년이 지나도 서랍장 위에 펼쳐 세워두었고, 나는 그걸 보며 툴툴대는 한편 마음이 불편했다. 그 감정에 구태여 이름 붙이지 않으려고 했고 그걸 이제 와 열어볼 뿐이지만.
어쩌면 아빠는 내 필체를 모를 수도,
내 글 또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그의 영혼을 너무도 당연하게 알아보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아빠 또한 나를 알아봤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