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내게 주고자 했던 것
아빠의 죽음 후, 가끔 괴로운 의심이 솟아올랐다.
아빠는 정말 나를 사랑했을까 하는 거였다.
아빠의 내연녀였던 O는 나더러 '너와 네 엄마가 못 했기 때문에' 아빠가 외도를 한 것이라고 소리쳤었다. 아빠의 불륜을 죄스러워할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 나라고. 할머니도 아빠의 신변 정리를 하면서 괴로워하던 우리에게 평소 잘했다면 아빠가 바깥으로 나돌았겠냐고 하시며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살아생전에도 알았고, 사후 처리를 하면서도 실감한 것이지만 아빠 인생의 우선순위는 정말 명백했다. 삼촌에 대한 복수, 그리고 사회적 성공. 나나 엄마, '가족'은 아빠의 최우선이 아니었다. 그게 과연 아빠에게만 그랬을까. 나는 가만히, 각자의 삶을 살고 돌아와, 각자 끼니를 해결하고, 또 각자의 방에 틀어박혔던 우리 세 가족을 회상해 본다.
아빠가 죽었다고 내가 덮어놓고 아빠의 사랑을 긍정해도 되는가. 정말 아빠는 그만큼 나를 사랑했을까. 나와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그럴 수 있었을까.
원래 마음이 약해지면 별의별 걸 다 의심하게 되어 있다. 그토록 완전해 보이던 것들도 모두 내가 만들어낸 착각은 아니었을까 두리번거리게 된다. 분명 오늘의 나를 만든 태초의 기억들이 내 안에 찬란한데, 그건 사실 환상이나 다름없다고 누가 작게 속삭이기라도 하면 금세 거울 속 나와 사진 속 아빠가 낯설어진다. 사람에게는 모두 다양한 모습이 있지만, 내가 아는 아빠는 정말 '부분'이었다는 게 시간이 갈수록 여실해져서.
아빠가 점점 낯설어진다. 낯선 이에게 받은 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한창 그런 생각으로 괴로웠을 때 예전에 사용하던 휴대폰을 정리하다 아빠가 보냈던 문자를 봤다. 아빠는 새삼스러운 명절 인사와 함께 당시 외국인 교수님께 놀림을 받은 내 이름의 기원에 대해 조근조근 설명하고 있었다. 이름 얘기는 질리도록 들었던 싸가지 없는 외동딸은 낯간지러운 문자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걸 읽으니 얼마나 고치고 고쳐 쓴 문자인지가 이제야 보였다. 그때 나는 그걸 알고 싶지 않아서, 그걸 알 자신이 없어서 애써 눈을 감았었다. 그랬던 주제에 감히 아빠의 사랑을 의심하다니.
나는 궁금했다. 아빠의 마음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아빠의 염원과 사랑이 어디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바로 내 이름이었다.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이름은 부모로부터 주어진다. 때문에 모든 이름은 나름대로 어떤 소망을 담고 있다. 밝게 자랐으면, 늘 정의로웠으면, 많이 웃고 살았으면, 자유로웠으면. 부모는 그렇게 자식의 행복한 운명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짓는다. 우리 아빠도 그랬다. 그럼 우리 아빠는 내 운명을 어떻게 꿈꿨을까.
나는 성도, 이름도 특이하다.
어렸을 때는 이름을 말했을 때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서 부연을 덧붙여야 하는 게 귀찮았다. 해외에서는 유명한 이름이지만 주로 마초적인 이미지의 남자들이 많이 쓰는 이름이라 영미권 외국인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름 얘기가 나오면 아빠는 작명소가 어쩌고, 뜻이 어쩌고.... 그런 얘기를 했다. 내 이름과 같이 마지막 후보로 올랐던 이름은 '지혜'였고, 엄마는 '유빈'을 밀었다고 한다. 적당히 평범한 여자애 이름이니까 그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개명을 하자고 했다. 유명한 점쟁이에게 점을 본 이모 옆에서 이름 점을 봤는데 점쟁이가 내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했댔다. 팔자가 빡셀 거라나. 이름을 모두 바꿀 필요는 없고, 획만 하나 바꾸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획 하나 바꾸는 걸로 내 특이한 이름은 평범하고 흔한 여자애 이름이 된다. 이름을 바꾸니 마니 했지만 결국 그 얘기는 흐지부지됐다.
그러다 아빠가 떠나고 난 뒤, 엄마가 다시 개명 얘기를 했다. 십 년도 더 된 얘기인데 그때 들었던 얘기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는 거였다. 우리는 크리스천이잖아...... 엄마는 나를 붙들고 그것이 엄마의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이름을 바꾸는 방향도 열어두고 괜찮아 보이는 이름을 모았다. 그래, 이 김에 지혜나 유빈이가 되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그때쯤 아빠의 문자를 봤다. 만약 내 이름 때문에 정말 팔자가 빡세지더라도, 그게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엄마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름을 바꾸자는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그래, 아빠가 지어준 이름이니까......
내 이름의 두 한자 모두 원래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라고 한다. 첫 번째 한자는 인생에 풍랑이 많아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 그랬고, 두 번째 한자는 거의 동일한 의미이지만 더 좋은 뉘앙스의 동음 한자가 있어서 그랬다. 어린애 앞에 두고 기억도 나지 않는 어른이 이름을 지적했다. 그에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따져 묻자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작명가에게서 받아온 이름인 줄 아느냐며, 자수, 부수를 엄청나게 고려했다고 화를 냈다. 뭐, 그게 뭐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다.
자, 여기서 반전 하나.
두 개의 한자 중 첫 번째 한자는 사실 항렬이었다. 아빠가 수집한 빼곡한 양장 족보책, 그것도 모자라 끊긴 후부터는 수기로 직접 기록한 그 족보책과 구글에 따르면 내 차례의 항렬이 그 한자란다. 이상하게, 흔한 이름도 성도 아닌데 구글링을 하면 성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 몇 보인다 했다.
혹시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기억할지 모르겠으나, 우리 아빠는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외가에 의탁해 구박덩어리로 자랐다. 무려 그 시절에 아들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저버리고 평생 어떤 의무도 다하지 않은 아빠의 친가는 선비 가문으로, 아빠의 친부는 유튜브를 틀면 선비나 훈장 직함을 달고 나온다. 그런데 아빠는 내게 자기를 유기한 그 가문의 항렬을 준 것이다.
아빠의 말대로 내가 먼 세상으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간절했던 소속감을, 유산을, 어떤 '증명서'를 내게 주고자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첫 번째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이름과 '지혜'를 두고 봤을 때, 항렬이 있는 쪽이 아빠의 외로웠던 유년과 어떤 무의식을 건드렸겠지.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냥 짠했다. 내 이름의 한자는 그 어떤 것보다 자유로운 한자인데, 아빠 혼자 보이지 않는 곳에 묶여 있는 것 같아서. 아빠에게는 동경과 자부심이었을지는 몰라도 내게는 그저 하잘것없이 후줄근한 껍데기나 다름없다. 이런 말을 하면, 아빠가 슬퍼할까?
두 번째 한자는 지혜의 의미를 담았다. 찾아보니 온화한 의미의 지혜에 쓰는 한자는 위에서 언급했듯 따로 있고, 이 한자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정을 나타낸단다. 정말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는 건지, 아니면 의미라는 것은 모두 제 멋대로 부여될 뿐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게도, 나쁘게도, 울퉁불퉁하기도, 뾰족하기도 한 나를 닮은 입체적인 한자다. 그게 아주 자랑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밉지도 않았다.
아빠의 소원대로 나는 영어 이름을 따로 만들지 않았다. 한국인도, 외국인도, 모두 나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른다. 나는 내 이름을 발음해 본다. 입을 가로로 넓게 벌리고, 혀가 입천장에 닿는 소리.
특이한 이름이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내 안에서 특별하다고 느껴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말해주고 싶다. 나, 이제 내 이름을 좋아한다고.
아빠가 내게 주고 싶었던 운명, 내 이름에 담긴 염원. 얽매인 곳 없이 자유롭게 뻗어 나가길, 지혜롭길.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다. 나만 해도 곧 서른을 앞두고 여즉 이름 같은 것에 매달려 징징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만약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 자기중심적이라 우리가 주는 사랑도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거라면..... 나는 아빠의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붙들었다.
이기적이고, 지밖에 모르고, 제 잘난 줄만 알고, 태어나면서부터 유난히 예민해 엄마 아빠 속을 많이도 썩였던 나. 그러나 이런 나를 독립적이고, 주체적이고, 당당하고, 섬세하다고 말해주는 세상도 있었다. 정말 우리가 이름대로 살아가는 거라면, 아빠의 염원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
친가의 삼 형제 중 개명하지 않은 것은 오직 아빠뿐이다. 아빠의 이름에서 두 번째 한자는 항렬, 돕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아빠만의 한자는 클 대. 아빠의 인생도 아빠의 이름대로 흘러갔던 것일까. 이름을 지은 이의 소망은 잘 실현되었을까.
그렇다면 큰 것은 고통뿐만이 아니었기를.
이 또한 나의 자기중심적인 염원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