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살아내야 한다'와 '아직 더 멈춰있고 싶다'의 사이
죽음은 무거운 주제다.
우리 모두 결국에는 죽을 걸 알면서도 막상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기피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렇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얘기하길 싫어한다. 실수로 그 주제를 건드리기라도 하면 놀라 사과한다. 3년 전, 아빠의 죽음은 엄마와 나의 인생을 무너뜨렸다. 하지만 3년 전 우리를 주저앉힌 것이 아빠의 죽음이라면, 3년 후의 우리가 아직도 멈춰있는 것 또한 오로지 아빠의 죽음 탓일까?
그래, 죽음은 무거운 주제다. 따라서 죽음은 남겨진 자들이 이제부터 떠난 사람 없이 다시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오래도록 회피하게 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 내가 아빠의 죽음을 명분 삼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두려움과 직면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꺾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왔다. 이것은 잔인한 서술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진정한 애도를 위해서 진실을 분명히 직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엄마는 원래 운동 중독에다 식단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마른 몸은 아니었으나 가족 행사에 참석하면 이모, 숙모들에게 늘 부러움 섞인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빠가 떠난 후, 서로 꼬박꼬박 끼니를 챙기자는 약속을 시작으로 엄마는 폭식을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너무도 쉽게 의학적 비만이 되었고, 체중 증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병원에서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한다는 권고를 했고, 이런저런 운동 수업에 등록해 보았으나 감량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엄마의 무의식은 먹는다는 걸 어떤 괴로움에 대한 보상처럼, 아니면 현실에 대한 망각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체중이 증가하며 엄마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살이 찌기 전 엄마의 모습을 알았던 친구들과 모두 왕래를 끊었다. 답답한 친구들이 계속 연락해 와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만남을 거부하는 날들이 거듭되자 사람을 좋아하던 엄마의 인간관계는 눈에 띄게 협소해졌다. 일과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꿈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엄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컴컴해졌다.
이 불도 켜지 않은 방이 엄마의 미래가 되면 어떡하지? 엄마의 세상이 이 캄캄한 방에 갇히면 어떡하지?
체중 증가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현실 도피, 즉 엄마가 사람들에게 체중 증가의 원인을 현재 복용 중인 가정의학과 약으로 속이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들이 엄마의 달라진 외모에 놀랄 때면 엄마는 '정신과 약 부작용'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럼 사람들은 저마다 안타까운 말을 건넨다. 의사 선생님께 '현재 복용 중인 약은 체중 증가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라는 소견을 함께 들었었던 나는 침묵했다. 엄마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 자괴감, 아마 그런 것들이겠지.
나는 엄마에게 감량을 위해 운동을 늘리던가, 운동을 하기 힘들면 식단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건강, 건강' 운운하니 언젠가 엄마는 '내가 너한테 짐 될까 봐 그래? 걱정 마'하고 쏘아붙였다. 당시엔 어떻게 저렇게 생각할 수 있지, 하도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었다. 하지만 엄마가 새벽에 눈치를 보며 냉장고를 열거나 몰래 방에 음식을 숨겨놓고 먹는 것을 목격하다 보면 솟구치는 감정은... 엄마에 대한 애정 어린 걱정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체중 증가보다 걱정되는 것은 수면제 복용이다. 나는 관련 학과를 전공했을 뿐 의사도 학자도 아니지만, 그래도 엄마가 복용하는 수면제는 플라시보의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하지 못한다고 거의 확신한다. 엄마의 수면 패턴은 수면제가 작용하는 방식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엄마는 권고대로 수면제를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중 수면제를 복용한다. 본래 수면제의 효능대로 짧고 컴팩트하게 통잠을 자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깨 가며 오랜 시간을 수면한다. 수면제는 비타민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니고 심리적인 안정 역할만 해주는 것인데 끊는 것이 어떻겠냐고 운이라도 띄우면 엄마는 곧장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싸늘해진다.
수면제는, 정신과 약은 엄마에게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을 담보할까? 효과도 보지 못하는 약을 매달 처방받는 것이, 엄마가 정신과를 아직 출입한다는 것이 왜 엄마에게 그토록 중요한 걸까?
나는 첫 직장에서 1년을 조금 넘기고 퇴사했다. 좋은 회사였다. 남들처럼 어렵게 취업 준비를 해서 들어간 것도 아니니 운이 좋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뭐라건 거기서 나는 내내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았다. 공과 사를 분리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공과 사를 분리할 수도 없고 그러고도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회사에 들어오면 세상 돌아가는 법을 좀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퇴사할 즈음엔 내가 얄팍하게 가지고 있던 엘리트주의가 전부 구마 되듯 치유되고 있었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고, 첫 직장 경험을 통해 행복한 삶이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인생을 살 때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다.
세 번의 퇴사 미팅을 했다. 팀장님, HR, 그리고 긴밀히 일했던 임원분. 퇴사 사유로 가족의 사후 처리와 사고 관련 민사 소송이 항소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누구 하나 말을 얹지 않았다. 자아나 정체성, 직무 효능감 같은 거창한 얘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었다.
엄마는 아빠의 사고 이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공포가 있었던 것 같다. '새로 생긴 고깃집에서 일할까?', 내가 얼마나 기막혀할지를 알면서 물어보는 눈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뭘 시험하는지는 몰라도, 자식도 아닌 엄마의 어리광을 받아주고 싶지는 않아서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일이 고된지 엄마의 히스테리가 말도 못 하게 심해졌다. 나와 대화도 하지 않으려고 해서 모녀 관계도 최악으로 치달았다. 엄마는 몸이 아팠고, 일하면서 편집증도 생겨 정신도 더 아파졌다. 나는 그걸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정말 고작 이만큼을 벌겠다고 이러는 거야? 사람들이 엄마를 불쌍히 여겨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엄마가 쉬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게 무서운 거야? 뭘 위해서 지금 엄마와 나를 이렇게 학대하는 거야?
죽니 사니, 따로 사니 마니 난리가 몇 번 나고 엄마는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말했다.
'엄마, 엄마도 남은 인생이 길고 지금 많은 나이도 아니잖아. 돈 없으면 죽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몸 마음 상해가며 벌기에 돈이 큰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루 벌어 하루 살 걸 생각하지 말고 멀리 봐야지. 남은 인생을 어디 쓰고 싶은지, 뭘 하면 행복할 것 같은지 고민해 봐.'
엄마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예전에 지나가듯 카페 오픈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어서 다시 한번 물었다. 엄마, 아직도 카페가 하고 싶어? 근데 뜬금없이 왜 하고 싶은 거야?
엄마가 웃었다. 술 취한 사람이 허공을 보고 말하는 것처럼 눈이 텅 비어 보여서 무서웠다. 생전 본 엄마의 미소 중 가장 초라했다. 엄마는 힘 없이 말했다.
"폼 나잖아."
그렇게 엄마와 나는 함께 공식적인 유예기를 가지기로 했다. 아빠 사후 엄마도, 나도 단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했으니 이제부터는 잠시 쉬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 것이다. 엄마는 우리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왜? 뭐가 어때, 남들이 뭐라든 무슨 상관이야. 하지만 엄마는 영 마음이 불편해 보였고 결국 나도 그러자 동의했다.
그리고 약 1년이 흘렀다.
우리는 여전히 잘 싸운다. 엄마는 음식을, 나는 조화를 사서 아빠를 묻은 곳에 간다. 사람들은 여전히 우릴 보면 괜찮냐고 말한다. 약이 몸에 많이 안 받는 것 같다고 엄마를 걱정하고, 우리 OO가 좋은 회사에 다녀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엄마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서로 약속한 휴식기동안 우리는 정말 얼마나 '휴식'했을까. 다시 일어나 앞으로 나갈 힘을 얼마나 비축한 걸까, 아니면 주저앉은 채 의미 없는 것들에 대해 되새김질만 하다 1년을 태운 걸까.
해가 뜨거나 지는 걸 보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불안이 솟구친다. 20대의 금쪽같은 1년을 태운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한편 진심으로 내가 불쌍해진다.
사는 건 선형적으로 발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 늘 성과 주체로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하던 삶을 살아서 이렇게 벤치에 앉아있는 걸 견디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변명하면 어때, 원하는 만큼 주저앉으면 어때.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아빠의 죽음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엄마도 나도 아직 아빠와 관련된 악몽을 꾼다. 아빠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아빠에 대해 얼마나 더 알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근데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 세상에서 멈춰 있을 수는 없잖아.
엄마를 본다. 엄마를 통해 나를 본다. 그러니 엄마에 대한 연민도 분노도 결국에는 나에 대한 것이다.
나를 본다. 거울을 본다. 나는 말한다.
유난스럽게 굴지 마.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족의 죽음을 겪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땅에서 기억을 파내듯 사는 건 아니야. 지금까지 해 놓은 게 아깝지도 않아? 얼른 일어나서 달려. 아빠의 죽음이 너의 인생을 가로막는 명분이 되어선 안 돼.
또 다른 나는 말한다.
달려봤자 주저앉을 걸. 이렇게 많은 후회를 겪고도, 너는 왜 조금도 자라지 못하는 거야? 제대로 살고 싶다며. 답도 내지 않고 또 남의 인생을 살고 싶어?
나를 다시 본다. 거울에 비친 나는 백치 같다.
'아빠가 없는 세계에서 내 힘으로 다시 살아내야 한다'와 '아빠가 있는 세계 속에서 아직 더 멈춰있고 싶다'의 사이, 아빠의 죽음은 내게 어떤 명분이 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