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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coyang Dec 21. 2023

아버지의 고백 1

엄마의 마지막 3개월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였다. 우리는 주말에 교대로 간병을 했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아버지가 엄마를 돌봐 드렸었다. 막내집에서 투석을 다니실때만 해도 좋았었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울대학교에서의 3개월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서 곁에서 지켜볼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웠었다. 간호사가 주사를 잘못이라도 놓아서 다시 주사바늘을 찌르는 날에는 수간호사를 불러서 강력한 항의를 하는 아버지였다. " 병원에 오는 이유가 뭐요. 나으려고 오는거 아니요" 몇마디 아버지의 말속에서 찐한 감동이 느껴졌었다. 엄마곁에 아버지가 계셔서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몰랐다.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갔고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보살피느라 갈때마다 줄어져있던 아버지의 허리벨트구멍이 아버지의 근심처럼 길게 아버지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 뭐라구? 평안북도 박천여자라구요?" 단숨에 맞선을 오케이한 아버지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마침내 엄마를 만났다. 사진관에서 명함사진을 찍으면 크게 확대해서 걸어놔도 되냐고 했을정도로 아버지는 그당시 꽃미남이었고 실제 사진을 봐도 너무 멋지셨다. 한살차이의 엄마도 잘생긴 아버지의 대시가 싫을 리 없었을 것이다. 단신으로 내려온 남한에서 아버지고향인 영변 근처 박천에 살던 여자를 만났다니 이건 운명이었고 두말도 필요없고 결혼해야한다고 생각했단다. 뭔가 채워지지 않는 실향민의 갈증을 풀기라도 하듯 엄마에게 빨려들어가는 그 느낌은 운명 그자체였을 것이다.  박천에서의 소중한 추억이 있지 않았을까 했는데 나중에 물어보니 아버지가 어릴 때 박천에 놀러가기도 했다고 그러셨다. 음식솜씨가 뛰어난 엄마의 북한요리는 아버지가 가고 싶은 고향의 맛이었고 최고의 맛이었으며 엄마는 이미 아버지의  최고의 여자가 되어있었다. 첫아들을 낳고 우여곡절끝에 신문광고로 찾게 된 우리 친할아버지는 온양에서도  털털이길을 버스로 한참 들어가는 시골촌에 살고 계셨었다. 나도 방학에 몇번 갔던기억이 있는데  넓직한 마당엔  작은 돌멩이하나 없이 매끈했고 우리가 가면 할아버지는 항상  가부좌로 앉아 계셨었다.  신문을 아침마다 정독을 하시는 걸 아는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월급을 털어 신문에 작은 광고를 냈었고 그걸 놓치지 않고 읽으신 할아버지는  신문사에 연락을 하여 만나셨다고 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늘 무서워서 오빠뒤로 숨곤 했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시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기억은 없다.



"영변남자라구요? 진짜요?" 엄마도 만나보지도 않은 남자에게 느끼는 설레임에 당황했다고 했었다.  만나보니까 남자답고 잘 생기고 고향이야기를 할때는 오며가며 스칠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동질감이 호감으로 마침내 결혼으로 이어졌단다.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있던 그 사진관에서 얼굴사진만 찍어서 남의 결혼사진에 합성하는 식으로 찍은 낡은 결혼사진속 두분은 선남선녀 그자체이셨다.  " 어서 먼저 출발해. 이 주소로 가 있어 . 내가 준비한 우리집이니까 난 여기 정리하고 이삼일 후에 출발할테니  어서 어서 " 다급하게 말하던  외할아버지의  작은 쪽지만 가지고 연약한 엄마랑 남동생과 함께 남쪽으로 남쪽으로 그 먼길을 걸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수일내로 따라갈테니   어서 먼저 쪽지에 적힌 곳으로 가 있으라던  외할아버지를 우리엄마는  끝끝내 만나지 못했다. 쪽지에 적힌 집이 우리집이라는 말만 하셨는데 막상 가보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런일이 너무 많았다고 들었다. 분명 우리집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사서 들어오는... 근처에서 맴돌며 외할아버지가 오시기만 기다리던 엄마와 할머니는 한두달이 지나면서  더이상 버틸힘이 남지 않았고 먹고살아남는것이 남편을 기다리는 것보다 중요하다라고 판단한 할머니는  그곳을 떠나 누추하고   못사는 동네의 한칸을 겨우 얻어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삼팔선이 그어지고...  희망도 없이 맨손으로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 상상도 안되는 이야기다.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건축가이셨는데 그 당시 일본사람들도 대단하게 생각했을 정도의 대목수라고 할머니한테 나중에 들었다. 그 집도 할아버지가 만든집이었는데 전쟁이 나자 아랫사람이 팔아먹은것 같다는 결론만 돌아왔었다.




영변남자랑 박천여자랑 만나서 첫아들을 낳고 온양에 계신 아버님께 "몇날몇시에 아들을 낳았습니다"라고 편지를 드리면 시아버지는 붓으로 성씨와 돌림자를 제외한 이름의 마지막 한글자를 써서 보내주셨는데 그게 우리의 이름되었단다. 삼대독자 외아들인 오빠는 호랑이 언니는 맑음 나는 사랑 ... 여기까지는 좋았다. 막내까지 딸을 낳았지만 아뢸수 밖에 없던 엄마는 편지를 띄웠고 할아버지는 외롭기외롭다는 달월자를 써서 보내셨단다. 엄마는 편지를 받고 기생들이나 쓰는 글자를 보내셨다고 한참을 울었고 아버지는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었다구 ..... 으이구... 엄마가 많이 스트레스를 받아서 인지 어째 막내는 삐쩍마르고 키만 컸었다.  호적에는 막내이름이 그렇게 올라가 있어도 우리식구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엄마가 아주 예쁜 현대식 이름을 지어주었기에 우리는 모두 예쁜 이름으로 막내를 불렀다.


엄마 아버지의 4남매를 향한 학구열은 대단했고 거의 버는 모든돈은 우리들의 학비로 쓰신것 같았다. 장위동에 집을 사서 서울로 서울로의 꿈을 마침내 이루셨다. 돈을 싸들고 강남에도 갔다는데 땅모양도 안좋고 엄마눈에 삐뚫어 보여서 안샀다는데...허걱...장위동이 뭐야...ㅋ 아무튼...

살아가는 모든 만족과 기쁨은 자식들이 공부잘하는거 였었다. 우리엄마의 유일한 사치라면 오빠의 졸업식에 갈 때였다. 장위동 시장통에 옷잘짓는 한복집이 있었는데 꼭 그집에서 새 한복을 곱게 맞추어 입고 가셨다. 너무 예뻤던 우리엄마.. 오빠가 막 전교1등으로 상을 받는것도 아닌데 우리엄마에게는 옥스포드였고 하버드였다. 너무나 소중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랑스럽고 소중한 삼대독자외아들이니까.....    


                                   후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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