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병원에서의 3개월이 막 채워질 때쯤 어느 주말 큰언니와 내가 와 있었다. 아버지도 물론 계셨다. 집에 들어가서 좀 쉬시라고 해도 그동안 눈에 띄게 야윈 아버지는 얼굴을 젓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아버지는 거의 의식이 없는 엄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시고 계셨다. 두분은 무슨 생각을 서로 나누고 계실까
분명 아버지는 소리없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테고 그 메아리는 분명 엄마에게도 닿고 있지 않을까.
몇번의 고비가 있었고 오빠새언니는 어제밤에 있어서 좀 쉬었다 다시 온다했고 엄마를 제일 좋아하는 막내는 오며가며 볼때마다 울고 있었다. 비극이란 이런걸 두고 말하는구나. 가슴이 멍한건 이런거구나 하며 엄마의 가날프고 힘든 호흡에 언니랑 나는 계속엄마한테 잘하고 있다고 말을 했었다. 저녁을 드리는데 아까보다 기운이 좀 있으시고 날 쳐다보시기 까지 하고 내가 귀를 갖다 대니까 나한테 한두말을 하는것이다. 너무 반가워서 와락 엄마를 끌어안고"뭐라구? 다시말해봐 엄마" 했다. 겨우 엄마의 말을 알아듣고 " 알았어 엄마 걱정하지 마" 라고 안심시켰다. 미음을 몇스푼 호수로 넣어드리는데 원래 한참만에 조금씩 들어가던 미음이 왠일로 쭉쭉 들어갔다. 정말 너무 기쁘고 좋아서 언니랑 나랑 막 엄마를 칭찬해주고 쓰다듬어 주고 곁에 있던 아버지도 헬슥한 얼굴로 미소를 보여주셨었다.
그렇게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밤에 식구들이 다 왔을때 엄마는 가셨다.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운다. 잊을수 없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평온했다. 거친 호흡을 하며 힘겨운 싸움을 안해도 되고 아픔의 고통에서 벗어났고 아이들 다 보고 남편도 보고 ..... 나는 엄마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을 잊지않으려고 계속 되뇌었다. 우리는 너무 많이 울었는데 이상하게 아버지는 많이 울지도 않고 오히려 병원에서 요구하는 이런 저런 절차에 응하고 계셨다. 나이가 들어도 철이 없었던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화가 났었다. 금슬이 좋기도 했지만 아버지때문에 엄마가 속상한 일도 많이 겪은걸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자꾸 아버지의 행동을 보게 되었다.
변변한 여행한번을 못가본 엄마를 위해서 올해 초에 빨간색 커플 폴로티셔츠에 청바지를 선물해 드리고 일부러 커플패키지 여행으로 두분을 제주도에 보내드렸었는데 같이 다닌 부부들이 우리를 너무 부러워했다고 엄마는 좋아했었다. 술을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우리들과의 여행에서도 늘 술을 찾으셔서 나는 싫었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 술드리라고 했었다. 두분만이 아는 아버지의 고뇌가 있었겠지... 옛날 아버지들 다 술한잔 하시면 기분이 좋았다 나빴다 그러는거 아는데 그래도 난 아버지가 술먹는 모습이 평소 젠틀하던 아버지와 달라서인지 너무 싫었다. 이런저런 이유가 다 나한테 달라붙고... 내 생각과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엄마는 10년은 더 살수 있었는데 ! 아버지가 술먹고 힘들게 하고 !아침마다 좁은 부억에서 아버지 좋아하는 고등어 맨날 굽느라 그 연기 다 마시고! 그것두 모자라 담배를 피우는데 자다가도 일어나면 피우셨으니 엄마 폐가 성할날이 있었겠냐고 '내속에서 화가 불처럼 일어났다. 아버지가 슬퍼서 막 울고 했으면 내속의 화가 좀 가라않았겠지만 막 소리내어 우는 우리한테 이제 그만 울으라고까지 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많이 울었고 그길로 열이 나고 목이 붓고 말도 안나오고 심한 몸살로 장례식장 구석에서 끙끙 며칠을 앓다가 겨우 장지에 갔다온 기억이 다다. 언젠가는 내가 아버지한테 꼭 따져 물어 볼거라고 다짐만 했었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기를 쓰고라도 추억이라는 걸 만들어야 하는건가 봐 " "더 없는 추억이 후회된다" 우리는 엄마의 49제 까지 잘 마치고 모여서 이런저런 말들을 했었다. 그 이후로도 제사후 긴 잡담은 우리집만의 전통아닌 전통이 되었다. 49제를 마치고 여전히 회복못하시고 마른 아버지한테 다가갔다. 아버지 괜찮으시냐구 물었다. 엄마가 나한테 했던 말을 전해야 하는데 아버지 마음을 먼저 알고 싶었다. 그나저나 너무 야위시니까 이런저런 감정들은 이미 다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그게 핏줄인것 같았다. 남겨진 아버지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대답이 없으신 아버지한테 " 아버지,엄마가 나한테 부탁했는데 아버지 혼자 지내게 하지 말구 나랑 권서방 옆으로 이사와 사시랬어요" 서울에 있는집 팔아서 지방은 집값이 좀 싸니까 작은 빌라하나 사고 남은 건 은행에 넣고 살수 있어요. 그말을 듣던 아버지의 눈에서 주루룩 눈물이 쏟아졌다. 항상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는 아버지의 손수건을 꺼내서 소리없이 눈물만 훔치셨다.
아버지는 엄마말대로 지방인 우리집 근처의 빌라로 이사를 왔고 그렇게 엄마 돌아가시고 딱 2년쯤 됐을 때 사위랑 술을 건하게 한잔 드신 후에 마침내 아버지의 고백을 들을수 있었다. " 내가 엄마를 많이 사랑했어. 더는 엄마가 힘들어하는거 볼수가 없었다. 나도 너무 힘들었어. 엄마가 가기 전날 엄마한테 이제 가라고 했는데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너희들 다보고 가더라. 안힘들어 보여서 좋았어 . 근데 지금은 그게 후회가 된다. 내가 죽어서 만나러 가면 나를 싫어할것 같아" 하시면서 또 눈물을 훔치셨다. 나도 따라서 한참을 소리없이 울었다.
고백이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은 세상 모든여자들에 대한 그리움으로,엄마의 빈자리는 세상모든여자들의 자리로, 아버지는 일명 빈자리 채우기 작전에 돌입 하신것처럼 보였다. 동네산도 예쁜 아줌마랑 다닌다는 정보가 들리고 살도 이제 많이 회복되어서 아직두 자기는 청춘이라며 알통을 막 사위한테 보여주구 그랬다. " 아니 할아버지들은 손주들 이쁜거 보면서 안 살아지나? "하면서 내가 막 농담을 하면 여자가 필요하다면서 또 농담을 받는데 농담속에 진심이 느껴지는거 뭐지? 그러다 얼마 후 아버지는 "누가 있는데 밥한번 권서방이랑 같이 먹자"고 하셨다. 또 금새 올라오는 부화를 꾹 참으며 만나봤는데 이 여자는 딱 첫눈에 아니었다. 내가 아버지 집 전세구 우리가 조금씩 용돈모아서 드리는걸로 산다고 해봤는데 약발이 제대로 먹혔다. 다행이었다. 아버지한테는 .... "세상 물정을 그렇게 몰라 아버지는.
딱 봐도 꽃뱀이던데... 은은한 화장에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분위기있는 말투에" " 그러냐.. 그날 이후로 소식이 없구나" " 아버지! 내가 구해줄게. 기다려 봐"
엄마가 나한테 한말중에 식구들한테도 전하지 않은 말이 있다. 아버지는 혼자 못산다구.... 니가 나중에 알아보라구.... 진정한 사랑은 그런건가? 모든게 용서되는 그런게 사랑인가? 우리엄마의 사랑은 내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범우주적 사랑이었나. 엄마의 예언은 딱 맞았다. 내가 진짜 힘들게 고른 수수한 여인을 만나서 사셨고 돌아가실 무렵엔 그분은 딸한테로 가셨다. 85세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엄마와 20cm 간격을 두고 합장을 했는데 엄마때와는 달리 아버지를 두고 올때는 왜이렇게 맘이 좋던지...이 글을 가족들이 읽으면 난 또 혼이 날거다 . 죽을때까지 말버릇 못고친다고... 근데 그게 사실인데 뭐. 우리아버지 닮아서 그런 걸 어떻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