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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 Earth Apr 06. 2023

클로버

나혜림 저,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사람들은 극복하는 인간을 좋아한다지만 사실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극복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하세요. 뭐 어떻습니까.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잖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피어날 겁니다. 응달에서도 꽃은 피니까요.

책을 읽을 때마다 늘 작가의 말, 작가 소개글부터 읽곤 하는 나에게 작가소개도 없고, 작가의 말도 작품 맨 뒷편에 있는 이 책은 다소 생소했다.

제 15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이라 작품 리뷰는 꽤 많았는데도 작가 소개 하나 없는 단순함이라니...


작가 소개가 있긴 했다. 아주 막한....

어린 시절에 글 쓰기를 좋아했다는 새싹부터 작가였다는 스토리도 무슨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다거나 하는 그런 전문성을 주장하는 스토리도 없는 그냥 작품 몇 개 썼다는 소개글이 전부인....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어나가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뭔 문장이 이래. 심오하잖아. 이거.


중2 의 정인이를 중심으로 악마도 나오고, 예수 이야기도 나오고, 몽마도 나오고, 파우스트도 나온다.

문장 하나하나도 버릴 게 없지만, 이런 묵직한 인물들을 데리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작가 필력이 책 앞날개에 두 세편의 책만 쓴 작가의 필력은 아니었던 것.


이 책을 이끌어나가는 중심은 당연 악마와 정인이다.

정인을 유혹으로 이끌려하는 악마와 미성년자의 이름으로 당당히 되받아치는 정인의 티키타카를 보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표정으로 악마를 한 방 먹이는 말 한마디가 왜 이리 우습던지.

이 세상을 마음껏 주무르는 악마인데 유혹에 빠뜨리려 애쓸 때마다 오히려 정인이의 손바닥에 올라 조몰락당하는 느낌이랄까... 토라진 악마가 어찌나 귀엽던지.

"3400년? 268년? 아저씨 몇 살인데요?"
헬렐은 이제야 조금 만족스러워졌다. 악마는 두 팔을 날개처럼 넓게 펼치고 몸을 부풀렸다.
"이 세상을 살았던, 살고 있는, 살게 될 모든 인간의 수명이 나의 나이다."
"아, 언어는 잘 해도 수학은 못하시는구나. 자기 나이도 못 세서 어떡해."
정인이 중얼거렸다. 토라진 악마는 고양이로 변해 한동안 벽을 보고 있었다.

정인은 기초생활수급자로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아가지만, 세상을 당당히 살아가려 노력한다. 교장선생님께 허가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하고, 틈틈히 폐지를 줍는다.


그래도 정인의 주변에서 묵묵히 그를 바라보는 재아도 있고, 고물상 아저씨도 있고, 할머니도 있다.


재아와 마주한 학교 쓰레기장 한 켠. 응달에 피어난 세잎클로버를 보며 감탄하는 재아, 가난하지만 언젠가 너도 피어날 거라고 정인이를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꼭 꽃을 피워."

그래, 그 클로버처럼.

"진짜가 뭔데요?"
"뭐든 네가 욕망하는 것! 상상력을 발휘해 보란 말이야. 최고급 스포츠카는 어때?"
"저 미성년자에요. 면허 없어요."
"그 놈의 미성년자. 미성년자! 너 말하는 것만 보면 나이를 선결제로 한 삼십 년 당겨 쓴 사람 같은데."
"철이 당겨서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네가 원하는 꽃을 모두 피워 줄게. 네 잎 클로버로 부족해? 그렇다면 다섯 잎, 여섯 잎, 일곱 잎••• 아니, 만 개의 잎을 가진 클로버를 네게 줄게."
"아뇨. 난 괜찮아요."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산다고 나중에 천국 간다는 보장도 없어. 천국의 입국 심사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아? 조건이 하나라도 어긋난다 싶으면 퇴짜를 놓는단 말이야. 현재만이 보물이고 소득이고 재산이며 담보라고.(파우스트 중에서)"
이제 악마의 목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인은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천국에는 관심 없어요. 나중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어요...(중략)... 내 식대로 방법을 찾아볼게요."
(중략)
"너 지금 나가면 여기 다신 못 와. 그래도 갈거야?"
"여긴 내 상상이라면서요. 내가 원하면 언제든 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악마가 말하면 속는 척이라도 해. 좀!"
기어코 악마가 분통을 터뜨렸다.


YOU LOSE!

 

 바람빠진 풍선마냥 피시식 꺼져가는 악마의 표정은 하지만,  근사한 게임 한 판이었다며 오히려 만족스러워보인다.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어. 70억명 꼭지가 돌게 하는 건 쉬운데 한 명을 사로잡는 건 어렵지. 어린애 하나도 쉽지가 않다니까. 모처럼 유기농 영혼 하나 맛보나 했는데 다 잡은 영혼을 9회 말에 놓치다니. 아무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야....(후략)

악마의 숙박비정산서로 얼마후 정인이 집에는 컴퓨터니 전자기기, VIP호텔 항공패키지까지 택배로 도착한다.


다섯 번을 연달아 읽고도 오늘도 이 책을 집고 있다.

공산당도 무섭다는 중2인데, 삼십 년을 선결제해버린 웃자란 중2 정인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웃자라버리는 바람에 가늘가늘 시들시들해졌을까.

악마도 이긴 아이니. 웃자란 이파리들을 기어코 양달로 밀어넣어 햇볕을 잔뜩 쬐어 단단하고 두툼하게 줄기와 뿌리를 내렸을까?

후일담이 궁금해진다.


추신...

이 책은요.

소장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저도 아직 이 책을 구입하진 않았지만요.

도서관에서만 몇 번째 빌리는지...

열 번도 훌쩍 넘게 읽었지만, 여전히 내용은 새롭고, 여전히 마음을 울리곤 합니다.

이 작가님의 필력.

진심으로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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