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림 저,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사람들은 극복하는 인간을 좋아한다지만 사실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극복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하세요. 뭐 어떻습니까. 딱히 다른 할 일도 없잖아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피어날 겁니다. 응달에서도 꽃은 피니까요.
"3400년? 268년? 아저씨 몇 살인데요?"
헬렐은 이제야 조금 만족스러워졌다. 악마는 두 팔을 날개처럼 넓게 펼치고 몸을 부풀렸다.
"이 세상을 살았던, 살고 있는, 살게 될 모든 인간의 수명이 나의 나이다."
"아, 언어는 잘 해도 수학은 못하시는구나. 자기 나이도 못 세서 어떡해."
정인이 중얼거렸다. 토라진 악마는 고양이로 변해 한동안 벽을 보고 있었다.
"진짜가 뭔데요?"
"뭐든 네가 욕망하는 것! 상상력을 발휘해 보란 말이야. 최고급 스포츠카는 어때?"
"저 미성년자에요. 면허 없어요."
"그 놈의 미성년자. 미성년자! 너 말하는 것만 보면 나이를 선결제로 한 삼십 년 당겨 쓴 사람 같은데."
"철이 당겨서들긴 했어요. 왜, 식물에 햇빛이 부족하면 위로만 가늘게 웃자란다면서요. 제가 좀 웃자랄 환경이었거든요."
"네가 원하는 꽃을 모두 피워 줄게. 네 잎 클로버로 부족해? 그렇다면 다섯 잎, 여섯 잎, 일곱 잎••• 아니, 만 개의 잎을 가진 클로버를 네게 줄게."
"아뇨. 난 괜찮아요."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산다고 나중에 천국 간다는 보장도 없어. 천국의 입국 심사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아? 조건이 하나라도 어긋난다 싶으면 퇴짜를 놓는단 말이야. 현재만이 보물이고 소득이고 재산이며 담보라고.(파우스트 중에서)"
이제 악마의 목소리는 애처롭기까지 했다. 하지만 정인은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천국에는 관심 없어요. 나중 일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어요...(중략)... 내 식대로 방법을 찾아볼게요."
(중략)
"너 지금 나가면 여기 다신 못 와. 그래도 갈거야?"
"여긴 내 상상이라면서요. 내가 원하면 언제든 올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악마가 말하면 속는 척이라도 해. 좀!"
기어코 악마가 분통을 터뜨렸다.
한 잔은 너무 많고, 천 잔은 너무 적어. 70억명 꼭지가 돌게 하는 건 쉬운데 한 명을 사로잡는 건 어렵지. 어린애 하나도 쉽지가 않다니까. 모처럼 유기농 영혼 하나 맛보나 했는데 다 잡은 영혼을 9회 말에 놓치다니. 아무튼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야....(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