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에서 용마산까지
평범한 일상입니다.
달라진 건 하나 있습니다.
날씨가 풀렸다는 것!
날씨가 풀렸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요.
어제는 결혼식장에 간 남편을 버리고 두 아이들과 자전거로 모처럼 한강을 달렸구요.
오늘은 한국사 시험이 있는 큰아이와 남편이 먼저 출발하고 저와 작은 아이는 큰아이 시험이 끝날 즈음 합류합니다.
퇴실 가능시간이 지나니 칼같이 달려오시는 아드님.
지난번엔 한 이틀정도나마 빡시게 기출문제를 풀렸는데요, 이번엔 1급 도전하겠다 해서 그래라 하고 접수만 해주었는데요. 거의 기출문제는 풀어보지도 않고 시험장으로 향했더니 뭐. 하하하.
점심을 먹으러 인근 분식집에 들어갔더니 오자마자 채점하는 아이와 엄마도 보이더군요.
굳이?
보니까 여기 저기에서 음식 나오길 기다리며 채점하는 게 보이네요. 헐.
답지가 이리 빨리 나오는 거였나?의아한데 큰아이는 저도 빨리 채점했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귀차니즘 에미의 칼차단으로 저녁 잠들 때에서야 결과를 들었다는 후문입니다.
(공부는 안했는데.(!?) 1급 획득에는 성공했네요. 요래조래 알고 있던 배경지식으로 찍기 신공을 펼치시니 하튼 희한한 아이이긴 합니다.)
남들이야 채점 하든 말든 우리는 밥 든든 먹고 아차산으로 향합니다. 의도하진 않았는데 시험장이 이곳밖에 남아있지 않아 접수한 게 호재가 되었네요.
지난번에 시간이 짧아 아차산을 끝까지 못 올라가고 고구려정에서 틀어서 내려왔었거든요.
이번엔 아차산 정상으로 가보자 하니 가족 모두 찬성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아차산으로 향합니다.
올라가는 입구부터 떡하니 앉아계신 고양이 두마리님을 영접하느라 한참을 지체했는데 둘레길로 가려니 우르르 바위 위를 오르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말로만 듣던 지름길인가?
늘 가던 산길이 아니라 바위산이 생소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네요. 모험을 시작하는 느낌이랄까요?호기심 가득 안고 바위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런 바위를 오르는 건 보통 정상 가까이 올랐을 때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위를 등반해보는 날도 옵니다. 오호...
힘은 들었는데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왠지 신나보이기만 합니다. 한참을 올라가고서야 나오는 고구려정. 앞이 탁 트인 한강과 아파트들을 바라보고 싶지만....
미세먼지가 가득해서인지, 안개가 가득해서인지 시야가 뿌옇기만 하네요. 그래도 탁 트인 바윗돌 위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챙겨온 간식들을 주섬주섬 펼쳐봅니다.
출발할 땐 추웠는데 바위산을 오르다보니 더워져서 하나씩 둘씩 벗어 가방속에 꾸역꾸역 밀어넣었는데요. 아침에 시험장 가느라 두툼한 패딩차림이었던 큰아이는 그 두툼한 패딩을 작디작은 가방 속으로 밀어넣겠다고 낑낑댑니다. 안되겠다싶어 제 가방 속에 넣은 걸 다 빼고 아이 패딩을 넣고 나니 문이 안잠기네요. 에라 모르겠다며 걍 커피만 홀짝이고 있자니 강바람 산바람이 제법 거셉니다. 움직일 땐 몰랐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꽤 센 날씨. 가방에 밀어넣었던 옷들을 다시 주섬주섬 꺼내입자니 아이고
그 고생을 왜 했는지 모르겠어서 다들 헛웃음만 허허 웃습니다.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다시 힘을 내어 올라갑니다.
오늘의 목표는 아차산 정상.
아차산 산세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바위산이 꽤 가파르기도 하구요. 얼음이 녹아 질퍽거리는 곳이 꽤나 많다보니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제 자전거 타느라 지저분해진 신발을 아침에 작은 아이와 열심히 닦아놨는데 도로아미타불이네요.
(작은 아이는 깨끗하게 닦아놔서 덜 더러워보인다네요. 무한 긍정에너지 뿜뿜에 에미는 흐뭇하기만 합니다.)
질퍽거리는 길인데 바윗돌틈이 좁은 곳들도 있어 꽤나 험한 산인데 의외로 작은 아이가 선방합니다. 자전거 타는 것보다 등산이 체질에 맞다면서 말이죠.
오랜만의 산행에 주중엔 늘 혼자인 큰아이도,
어제 결혼식에서 음주를 하시는 바람에 본의에 맞게 집에서 푹 쉬신 남편님도,
험난한 자전거 바퀴 굴리기보다 낫다면서 신나서 쉬지않고 종알거리는 작은 아이도,
넷 중에서는 가장 저질체력인 에미도 그저그런 산길의 연속이 아니라 다이나믹 모험가득한 새로운 산길이 계속되니 긴장하면서도 설렜나봅니다.
설레는 마음과 달리 얼굴은 힘들어서 찌그러져갈 즈음, 드디어 아차산 정상이 나타납니다.
정상이라고 하기엔 능선 중간즈음에 있는 표지판이 전부라 그냥 지나칠 뻔했는데요. 그래도 늘 둘레길만 다니다가 처음으로 밟아보는 산 정상이 신기해 줄을 서서 기념샷도 찍었답니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
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산길은 용마산으로 이어졌습니다. 알고보니 아차산 정상은 쪼꼬미였구요. 용마산 정상까지가 진짜였더라구요.
음.....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헬리콥터가 내리는 곳 두 곳, 보루 4개를 지나고서도 한참을 올라가서야 드디어 용마산 정상이 보입니다.
탁 트인...이라고하기엔 뿌연 하늘이이라 다소 아쉽긴 하지만 뻥 뚫린 시야에 가슴이 활짝 펴지는 느낌입니다.
높이가 350m도 채 안되는 용마산도 이리 오르기 힘든데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체력은 얼마나 대단해야 할까요? 속으로 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 생각을 꿰뚫듯 큰아이가 한 마디 던집니다.
엄마, 다음엔 한라산 올라가고 싶은데.....
으음....
그...그래. 아들아. 대신 조금 많이 많이 지나서 가는 걸로....으흐흐흐...
아까 오른 아차산은 좀 어설픈 정상이라면,
용마산 정상은 오를 만 하다. 고 평가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웬지 산 정상 좀 가봤다 할 때 디밀 수 있는 정상 표지판이기도 하구요. 능선 가운데 있는 아차산 정상과 달리 여긴 진짜 산정상 같은 뾰족한 느낌이었거든요. 하하. 아이들이 산 그림 그릴 때 나오는 그런 뾰족한 정상 말이지요.^^
처음으로 정상을 밟아본 아이들 표정도 밝습니다. 그렇게 산을 많이 다녀봤지만 정상 다운 정상 표지판은 처음 밟아봤으니까요.
호기롭게 다음 코스는 한라산!을 외치는 큰 아이 말을 애써 듣지 않은 척 슬그머니 정상을 내려오는 길.
가파른 계단을 한참이나 내려와야 하는데 저 멀리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 전망대.
에미는 말로만 가지마!!를 외치며 두 다리를 덜덜 떨고 있는데 큰 아이는 이미 다다다 뛰어서 전망대 난간을 잡고 섭니다. 에미는 사진 찍어줄 엄두도 못 내고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저 멀리서만 빨리 오라며 소리 깩깩 지르고 있었다지요.
남편이 덜덜 다리를 떨면서도 호주 블루마운틴이 바라다보이는 링컨스락에서의 경험 덕인지 그래도 가까이 가서 후다닥 사진을 찍어주고 내려옵니다. 휴우....
계속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
오르막길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걸음 한걸음 후덜거리는 다리를 옮겨봅니다.
내려오는 길,
작은 아이에게 미끄러지니 조심하라며 잔소리하던 에미가 보기좋게 모래 위를 미끄러집니다.
뒤따라오시던 아저씨 한 분이 혀를 끌끌 차며 아들보다 산 못타네 라고 한 마디 하시네요.
흑흑. 맞습니다. 맞네요..
한 시간 여를 내려오고서야 드디어 지상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다리도 덜덜덜 떨리고 해질녘 한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져버렸네요.
여전히 덜덜 떨리는 다리로 겨우겨우 씻고 누우니 피로가 한번에 몰려옵니다.
내일 출근인데....아흑.
아들 두 놈은 말짱한데 부모만 낑낑대는 하루가 또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