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배회하는 사람들의 천태만상
큰 아이의 경우 애청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늘 운동시간에 걸려있다보니 라디오를 포기 못 하는 날에는 과감히 운동을 포기하고 라디오를 택하곤 하는데요. 그래도 라디오 코너가 관심분야가 아닌 요일이 있다보니 그래도 평일 중 하루 이틀 정도는 꼭 한강을 달리곤 합니다.
큰 아이의 시험 기간인 요즘이지만, 신기하게도 공부의 내용물만 내신으로 바뀔 뿐 학습 시간이나 라디오 청취 시간이 바뀌진 않습니다. 공부 시간이 늘어나지도 않고 문제집 껍데기만 바뀌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한숨은 나오지만, 어찌되었든 참 규칙적인 생활이다보니 한강을 달리는 일정도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있지요.
달리는 코스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정도의 차이일 뿐 늘 가는 곳도 비슷한 패턴인데요.
늦은 시간에 나오는 날엔 짧은 왼쪽 코스를 조금 서둘러서 나오거나 여유로운 주말엔 길게 갈 수 있는 오른쪽 코스를 달리곤 합니다.
선선한 가을 밤.
저와 작은 아이가 자전거도로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남편과 큰아이는 각자의 속도에 맞춰 달려서 같은 목적지에서 만나곤 하는데요.
큰아이는 핸드폰이 없으니 당연하구요. 남편도 몸을 가벼이 가야 하기에 핸드폰을 저에게 맡기고 가다보니 어디에서 만날지 사전에 약속해야만 합니다.
물론 이젠 일상인지라 굳이 약속하지 않고도 만나는 지점 지점이 있으니 척하면 딱하고 기다리곤 하지요.
저녁시간 한강을 달리다보면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구요. 무리를 지으며 같이 달리는 러닝 크루들도 곧잘 눈에 띕니다.
워낙 규칙적인 일상이라 그런걸까요?
가끔 보면 눈에 익은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데요.
서로 아는 사이라는 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눈에 띄는 사람들 이랄까요.
나란히 걷다 뛰다를 반복하는 아버지와 아들.
중년의 아빠와 고등학교 즈음의 아들인데요.
달리는 두 사람에게서 표정을 발견할 수 없어 저도 모르게 관심이 간 것 같습니다.
무표정으로 걷는 두 부자는 어쩐지 요즘 세대의 모습을 보는 듯했거든요.
두 부자의 모습을 스치듯 지날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상상의 드라마가 펼쳐지곤 하는데요.
집이라는 동굴 속에서 나오려하지 않는 은둔 청년과 어떻게든 동굴 밖으로 꺼내고 싶은 아버지의 모습 말이죠.
그런 제 마음 속 상상 때문인지 그 아버지의 표정은 아들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 그리고 일말의 기대가 섞이면서도 아들과의 관계가 아직은 어색한 아버지의 심리가 묘한 무표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 부자의 모습을 쓰윽 훑다가 다시 혼자만의 상념에 젖어 달리다보면 어느새 약속 지점에 도착하지요.
달리기가 워낙 빠른 큰 아이는 자전거와 거의 동시에 도착하곤 하는데요.
어우. 내 심장이....
온갖 엄살에 엄살을 부리며 걷다 뛰다를 반복하는 남편은 한참이 지나서야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눈에 띕니다.
남편을 기다리다보면 운동하거나 대화를 하거나 혼자서 멍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각자의 사연을 담고 운동이나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바라보자니 호기심에 두리번두리번 거리게 되네요.
에미가 그러거나 말거나
작은 아이는 어느새 자전거에서 내려 저 멀리 뛰어가버리고요. 대자로 뻗어버린 큰 아이가 숨을 돌릴 때를 기다리면서 두리번거리는 시선 너머에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살랑입니다.
한층 서늘해진 바람에 저멀리 헐떡이며 남편이 보일 즈음 다시 다음 코스로 뛰기 시작하는 큰 아이.
그 뒤를 작은 아이와 제가 자전거로 따라가다보면 남편의 얼굴이 다시 어슴푸레 멀어지지요.(남편. 미안~)
그렇게 다음코스에 도착해서 아이들과 경치를 즐기고 있자니 저멀리서 뛰어오던 남편이 허겁지겁 손을 휘저어 오라고 손짓하네요.
뭘까. 하고 가보니.
보노보노 친구 너부리 처럼 생긴 요 놈.
너구리입니다.
허허허.
양재천에 산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한강 근처에서는 처음 보네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신기한 녀석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당황스러운데, 요 녀석. 아주 천하태평입니다. 바라보는 사람들을 슬몃 쳐다보더니 동네 강아지마냥 무심한 표정으로 제 갈길을 가네요.
한 놈이 끝이 아니라 나중에 보니 다섯 마리의 대가족이었습니다. 덩치가 비슷해서 가계도까지는 파악 못했지만 말이죠. 하핫.
그렇게 한참을 너구리 근처에서 배회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남편과 큰아이는 러닝으로 작은아이와 저는 자전거로 말이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이 왔습니다.
뜨거운 뙤약볕이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말이죠.
이제 큰아이의 시험이 끝나면 축제의 계절이네요.
좋은 강연과 축제가 있는 가을.
시험아 어서 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