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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m Jul 13. 2021

연애가 더 이상 사랑이 아닐 때



 연애戀愛가 연애憐哀가 되어 버려서



 연애, 개인적인 체감으로는 한국인이 돈이라는 단어 다음으로 사랑하는 단어인 것 같다. 특히나 젊을수록 열광하고 나이가 들어도, 열광한다. 나도 20대 내내 가장 열심히 한 것이 일과 비등하게 연애였다. 어쩌면 더 열심히 했을수도 있다. 연애. 곱씹을수록 어색해진 단어다. 10여 년간 몇몇의 인연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금은 나만 사랑한 지가 몇 년이 되었다. 이젠 나의 시간을 내가 온전히 사용을 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꼭 해야 하는 루틴이나 공유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을 방해받는 것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30대에 들어서니 주변에서 더욱 한 마디씩 하기 시작한다.



 이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누자면 "연애 안 해요?" " 만나는 사람 없어?” 라며 연애 유무에 대해 대놓고 이유를 묻는 연애 유무 직관형과  "소개받을래?" "소개 좀 받아 "라는 소개 권유형이 있다. 전자는 나의 연애의 유무를 모르는 사람들 일 테고 후자는 아는 사람들이다. 두 부류의 공통점은 결국 연애를 하라는 것이고 나의 대답도 공통적이다. 입을 다물고 고개를 내 젓는다. 처음에는 우습게도 이유를 설명했었다. 시간이 없어서요. 만날 곳이 없어서요. 하는 거짓 섞인 진실들일지라도 말했다. 지금은 그저 에이, 하는 뜻 없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젓고 만다. 질렸다는 표정까지 곁들인다면 설명보다 이 편이 더 대화의 방향을 우회하기가 쉽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를 하다가 친구가 동그란 눈으로 놀라움을 표현한다.



 "뭐? 네가 벌써 연애를 쉰 지가 그렇게나 됐다고?"



 많은 의미가 내포해 있는 문장이다. 시간의 덧없는 흐름의 경과와 우리 나이의 실감, 그리고 천하의 사랑꾼이었던 네가 그렇다니 너무 놀랍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큰소리로 웃고 그렇게 됐더라고 하며 나도 몰랐다며 덧붙인다. 나는 이제 연애라는 단어에는 사랑이 포함되지 않는 것 같다고도 말한다. 그러면 친구는 그게 무슨 음주는 했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은 이야기냐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 나는 이젠 사랑이라는 단어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다고 연애는 그저 연애라고 말한다. 20대 내내 나는 소위 망한 연애를 자주 했고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소모되었다. 시간, 돈, 꿈, 마음, 재능 그런 것들을 소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연애고 대신 그것들을 한 사람에 대해 가족만큼 혹은 그보다 깊이 알게 되고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하게 되고 누구와도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주고받는 것으로 그 소모들과 맞바꾸는 것이 연애다. 다소 비관적인 감상이지만 10여 년간의 나의 느낀 점이다.




 내가 망한 연애를 자주 했다는 것은 바로 그 보이지 않는 물물교환의 저울이 나에게 너무 기울었다는 것이다. 첫 연애가 중요하다는 것을 첫 연애가 시작하고도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열여덟의 겨울이었고, 이후 7년 가까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사랑스럽지 않은 연애를 이어나갔다. 그냥 그 아이가 너무 좋았고 나는 노력이 가장 자신 있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그 마음이 같았겠지만 어느 순간에는 달라졌다. 어떤 관계든 마음이 더 큰사람이 지는 사람이기에 나는 항상 자주 지는 사람이었다. 이해하면 안 되는 것까지 이해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내가 부족한 탓으로 돌렸다. 요즘 자주 보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가스 라이팅을 자주 당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연애에 참 적합하지 않은 아이였다. 지금도 감정과 감성이 상당히 예민하지만 그때는 심지어 피해의식과 질투까지 꽤나 있었던 것 같다. 작은 자극에도 쉽게 반응하고 사랑하는 마음마저 너무 벅차 가끔은 방금 내린 커피에 혀를 덴 듯 어쩔 줄 몰라했다. 조금 치사하게 말하면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였다. 내가 보고 자란 유일한 사랑의 형태는 엄마의 희생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를 깎아서 사랑을 표현하고 주머니를 탈탈 털어 다 해주고도 더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없을 땐 몰랐지만 사랑을 가지게 되고 나니 그 달콤함에 가져도 가져도 욕심이 너무 나서 자주 눈이 멀었다.  



 질기고도 질긴 첫사랑이 물에 씻은 솜사탕처럼 허무하게 끝이 나버려서 또 방황했다. 그때의 나를 너무 비웃어주고 싶을 만큼 그 사람에게 맞췄었기에 그 사람이 없어지고 나니 나도 없어졌다. 그땐 정말로 미쳤던 것 같다. 거의 종교처럼 그 사랑을 믿었었다. 너무 어릴 적부터 만나 함께 꿈꿨던 미래나 우리가 사랑했던 습관들, 너를 중심으로 돌아갔었던 일과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나는 나의 존재의 쓸모조차 잃어버렸다. 한동안 방황을 하며 기억에도 없는 인연들이 스쳐 지나갔고 곧 내 연애 역사상 최악의 빌런을 만났다. 처음의 그 남자는 내가 만 원짜리 밥을 사줘도 고맙다고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일 년이 지나자 40만 원짜리 선물을 당연하게 받는 사람이 되었다. 그때 나는 스물다여섯의 나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의 뒤통수를 한 대만 때리고 싶다.



 그는 허례허식과 관심을 즐기는 종자를 가진 사람이었고 SNS에 내가 준 비싼 선물들을 자기가 산 것처럼 올리고는 우리가 만났던 2년 내내 여자 친구가 있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 문제도 참 지겹게도 싸워댔다. 키가 큰 내가 하이힐을 신고 나가면 마치 액세서리 자랑하듯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면서 또 다른 날은 옷차림으로 무안을 줬다. 그의 악행은 일일이 나열하자면 끝이 없고 그 연애로 크나크게 배운건 나는 정말 호구였구나, 하는 생각과 나의 사랑의 방식이 어딘가 잘못됐음을 비로소 느꼈다. 상처투성이였던 첫 연애의 기억이 뼛속까지 세겨진지라 나는 아픔이 사랑이라는 착오를 저질렀다. 물론 그 둘은 쌍둥이기 때문에 항상 함께 다닌다. 하지만 사랑의 증거는 아픔보단 행복, 기쁨, 즐거움이 더 우선이어야 한다는 걸 몰랐다. 끊임없이 상처를 내서 사랑을 확인했다.



 

 마지막 연애는 비교적 가장 안정적이고 서로 저울이 크게 기울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었고 정말 사랑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 함께이지 못한 건 결국 나를 자신보다는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단점도 나를 위해 변하진 못했다. 그래서 또 다르게 상처가 남았다. 도무지 사랑이 사랑으로 되지가 않아서, 그렇게 사랑해도 되지가 않아서, 사실 모든 연애의 끝은 그렇다. 죽어도 안 되는 한 가지 때문에 헤어진다. 100가지가 사랑스럽지만 치명적인 1가지 단점이 우리가 우리일 수 없게 한다. 마지막 연애를 제외하고 나의 모든 X들은 내가 사랑하는 자신에게 도취되어 나를 함부로 다뤘고 먼저 헤어짐을 통보하고는 한 달 뒤 울면서 집 앞에 찾아왔다. 네가 잘나서 내가 잘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잘나서 너한테 잘해줬었다는 사실을 그때야 안다. 그리고 나도 그때야 알게 된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다.



 연애戀愛 의 한자를 뜯어본다. 그리워할 연戀과 사랑 애愛가 맞닿아 만든 단어다.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리워하고 사랑한다 정도가 되겠다. 좋아하면 매일 보고 싶은 거라는 말을 함축시켜 놓은 듯하다. 하지만 나의 연애는 불쌍히 여길 연憐과 슬플 애哀가 만나 불쌍하고도 슬프기만 했다. 그런데 또 재밌는 건 가엽게 여기는 그 마음마저 사랑이라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만들었다는 그 연민 말이다. 슬플 애라는 한자마저도 슬프다, 가엽다와 불쌍히 여기다, 사랑하다, 애지중지하다 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완벽한 가련은 없나 보다. 나는 나의 이 불쌍하고도 슬픈 연애가 실은 나와의 관계였다는 것을 서른 즈음에 깨달았다. 내가 나를 건강히 사랑하지 않아 나와 연애憐哀를 하고 있었다.



 그제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이 시간에 너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너는 무엇을 싫어하는지 마치 연애를 시작할 때 서로에 대해 궁금함을 가지듯 나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나와 친해지기 시작하고 나와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내가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의 사랑이 없이도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친구나 가족들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나의 연애는 사랑의 카테고리에서 쫓겨난 상태지만 그 단어를 완전히 삭제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너무 좋아서 너무 싫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사이가 좋아진 지금, 연애憐哀를 연애戀愛로 고쳐 쓰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언젠가는 모르는 척하고 슬쩍 테두리에 걸쳐 놓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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