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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m Jul 05. 2021

내성적이지만 춤추는 걸 좋아해요


 저 좀 봐주세요. 대신 고개는 돌리고요.



 서른의 초입, 진지하게 나라는 인간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왜 이런 생각들과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기혐오가 그 발단이었다. 혼자의 생각만으로는 명쾌하지 않아 자주 오은영 박사님에게 묻고 싶어 졌다. 하지만 우리 집엔 오은영 박사님이 없으니 결국 거울을 더 자세히 들여다봤다.



 나의 사춘기 시절은 원하는 걸 말하지 못했고 공부도 그다지 잘하지 않았다. 집에서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자주 말하지 못하거나 통제당했다. 나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반장과 부반장을 번갈아 가면서 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전교회장 출신이다. 나는 상당한 I형 인간으로서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장은 하고 싶었다. 자라나면서 나의 모순적인 성향들은 더 짙어졌다. 누군가의 시선은 불편하지만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고 발표를 위해 준비하고 그것을 잘 해내면 엄청난 성취감이 밀려왔다.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았고 면접에는 강한 스타일이었다. 집안에는 마음 붙일 곳이 없어 친구들과 항상 밖으로 나돌았지만 혼자 카페에 있는 시간을 가장 즐거워했다.



 사람은 입체적인 동물이기에 누구나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의 입체적인 모습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꽤나 걸렸다. 지금은 스스로를 요즘 말로 ‘아싸 중에 제일 인싸’ ‘내적 관종’ ‘선택적 은둔형 외톨이’ 정도로 정의하지만 그래도 어릴 때는 지금보단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조금 더 도전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눈치를 덜 보았었다. 장기자랑시간에 춤을 추고, 응원단 동아리에 들고, 그림을 그리고 더 짧은 치마를 입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는 일이거나 주목을 받아야 더 빛이 나는 일들이었다. 지금도 일기장이 아닌 이곳에 글을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각해보면 외향과 내향의 밸런스가 보다 비슷했던 열댓 살부터 원치 않는 시선을 자주 받으며 성희롱과 성추행, 노출증 환자들의 표적이 되거나 경미한 학교폭력을 당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싫어할까 봐’하고 싶은데 하고 싶다는 말을 못 해서 나는 더욱 모순덩어리 선택적 내향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옷을 화려하게 입어서, 키가 커서, 그냥 눈에 띄어서, 성숙해 보여서, 그때 그곳을 지나가서, 네가 팔자가 사나워서, 나는 혼이 났다.






 지금 보다 더 용기 있던 열여덟, 길거리 캐스팅이 유행이었다. 길거리 캐스팅을 가장한 유령회사들도 많았다. 그래서 종종 받는 명함들을 족족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부 어른들의 표현으로 ‘딴따라’를 아빠는 싫어했고 나는 내가 그렇게  예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지하철에서 받은 명함 하나는 버리지 않고 집으로 가져왔다. 당시 그 캐스팅 매니저의 얼굴이 신뢰감이 가서 라는건 사실 핑계였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 존재하는 회사였고 나름 활동하고 있는 아역배우들이 많았다.



 며칠을 끙끙 앓다가 용기를 내서 엄마에게 말했다. 가보고 싶다고, 안된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했던 엄마는 회사까지 함께  동행해주었다. 인생의 최초이자 마지막 오디션을 보았다. 오디션이라기엔 카메라 테스트에 가까웠지만 너무 떨렸다. 전교생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아침 조회를 진행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카메라렌즈는 내가 본 눈 중에 가장 컸다. 내향형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용기를 내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며칠 뒤 집으로 전화가 왔다. 엄마가 그 전화를 받았고 나는 숨죽여 청각에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닙니다. 애 아빠가 싫어해서요"



 그날 나는 내방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그럴 거면 왜 그곳에 함께 가주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당연히 안될 거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할 수 없었다. 화는 나지 않았고 억울하긴 했다. 나의 비밀스러운 작은 꿈이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열여덟의 나는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살다 보니 열여덟의 꿈이 거세당한 건 크게 별일은 아니었다. 세상엔 노래를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춤도 잘 추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어차피 지는 싸움이라고 생각하니 억울함은 조금 가셨지만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아니, 내가 이걸로 먹고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취미는 할 수 있잖아?"



 벼랑 끝에 서서 갑자기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혼자 답을 하며 의문을 가졌다. 나는 프리랜서기 때문에 고정된 시간과 날짜에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정말로 큰 결심이 필요하다. 고정지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검색창에 집에서 가까운 무용학원과 정신과를 두고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결국 무용학원을 선택했다. 나의 오랜 우울과 무기력함, 그리고 상처는 약을 먹으면 좋아질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걸 해보자고 생각해서 무용학원을 등록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 외에 나름 제대로 춤을 추는 것은 10년 만이었다. 지금은 그 학원을 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나를 살리는데 가장 일조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생각과 말, 취향이 통하는 인연들을 만났고, 난생처음 '완전한 자유로움'을 느꼈다.



지금도 종종 춤이 추고 싶어 지면 혼자 연습실을 빌려서 쉼 없이 움직인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 홀로 뒹굴고 뛰는 거울 속에 나를 바라본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이 가빠오는 숨과 붉어진 뺨이 꽤나 자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그러면 또 한 번, 나는 살고 싶어 진다. 누군가들의 시선도 상관없어질 만큼. 서른이 넘은 나는 내성적이지만 이제는 춤추는 걸 좋아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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