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6 이제 정말 집으로
마드리드의 도살장에서 도축된 소들은 리베라 데 쿠르티도레스(Ribera de Curtidores) 거리의 가죽공장으로 옮겨졌다. 거리에 피의 흔적(스페인어로 ‘라스트로’)을 남겼다고 하여 명명된, 엘 라스트로(El Rastro)의 벼룩시장은 4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한다.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열리는 전통시장, 관광객은 물론 현지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관광 명소다.
일찍부터 활기가 차오르는 거리는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했다. 이곳은 하나의 문화와 예술을 체험하는 곳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상점들이 있다. 대략 3,500개의 상점이 모여 있다더니 들은 대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골목 입구부터 알록달록한 색감의 빈티지 의류가 빼곡하고, 고급 가죽을 생산하는 나라답게 가죽으로 만든 가방, 신발, 지갑 등 소품과 액세서리가 즐비하게 늘어섰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고가구는 마치 예술 작품처럼 진열되었다.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형형색색의 화려한 접시와 주방 소품들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릇 가게에 들러 내가 만든 요리를 담으면 어떨까, 상상하면서 접시를 들었다 놓았다 서성이는 재미도 쏠쏠했다.
중고 책 애호가를 위한 카네로 거리(Calle del Carnero)와 카를로스 데 아르니체스 거리(Calle de Carlos Arniches)도 유명하다.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그윽한 책 냄새에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새 거리’로 알려진 프라이 세페리노 곤잘레서 거리(Calle Fray Ceferino González)에서는 이름처럼 다양한 새와 동물을 판매했다.
화가의 거리, 산 카예타노 거리(Calle de San Cayetano)에서는 그림과 예술 작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모여 있다. 랜선까미노 식구, 이찌고님의 행복 도파민 작품과 분위기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는 그럼을 몇 장을 찍어 카톡으로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과 함께 멋지게 완주한 나를 응원하는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흙 속에서 진주라도 찾을 기세다. 다들 눈동자를 섬광처럼 반짝거리며 이리저리 가게를 쫓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바퀴 시장을 돌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며 숨을 고르니 어느덧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다.
천재지변으로 하루 더 발목 잡혀버린 스페인에서 이젠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다. 오랫동안 꿈꾸고 간절히 바라왔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지만,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마치 죽은 나무 밑동에서 싹이 트고 새로운 가지가 쭉쭉 뻗는 것처럼, 나는 새로 움튼 희망을 보았다.
소중했던 여정은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나를 이 자리로 다시 부를 것이다. 나의 일상과 언제나 함께하게 될 노란 조가비와 화살표, 걸음을 멈추게 했던 많은 풍경과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모든 순간이 마법처럼 특별했다. 힘든 오르막길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영상이 날 다시 웃게 했다. 사진 속 꾹꾹 눌러 담은 추억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내게 주겠지. 그날의 웃음소리, 그때의 눈물, 들춰볼 때마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나를 지탱하는 자양분이 되리라 믿는다.
이제 희망 가득 채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스페인의 찬란했던 여정을 마무리했다. 스페인과 작별이 아쉽지만, 새로운 도전을 향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고마워, 스페인 다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