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4 오렌세에서 다짐한 나의 마음
11월 2일, 순례자 사무실 앞은 서로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몇 번째 산티아고세요?”
질문을 받는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 여정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곳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이야.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순례자 중에서 인증서를 처음 받는 건 나뿐이었다.
앞니가 쏙 빠진 해맑은 웃음과 어울리지 않는 짱짱한 다리근육의 소유자, 일본 할아버지는 10년 동안 해마다 산티아고를 찾았단다. 대부분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그 이상, 인증서를 다시 받기 위해 기다리는 순례자들이었다. 나 역시 내년에도 후년에도 내 몸과 상황이 허락된다면 매년 오고 싶었다.
어느 길로 걸었는지, 우리는 각자 지나온 길 위에 남긴 추억을 나누었다. 무사히 도착한 자신을 자축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보듬고 안아주었다.
이곳에서 크레덴시알에 찍힌 세요로 걸어왔던 길을 확인하고 인증서를 받는다. 산티아고를 100km 앞두고는 매일 두 개 이상의 세요를 찍어야만 인정해준다. 차례를 기다리며 앞에 선 순례자의 인증서를 받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흐뭇하고 좋아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드디어 나의 차례, 앞에 계신 직원에게 크레덴시알을 내밀었다. 직원은 힘들지는 않았냐고, 정말 대단하다며 반갑게 인사했다. 크레덴시알에 찍힌 세요를 확인하고 마지막 산티아고 대성당 세요를 찍어주었다.
순례자 사무실의 직원들은 모두 산티아고 길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자발적 봉사로 이곳에 머무는 직원들은 따스한 웃음으로 순례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Congratulations!”
드디어 나의 이름이 새겨진 인증서 두 장을 건네받았다.
인증서를 담을 원통형 전용 케이스와 순례자의 표식, 조가비도 하나 구매했다. 인증서를 받아 든 순례자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서로의 시간을 격려하며 뜨겁게 인사했다.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큰 감동으로 사람들을 끌어안았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젊은 여성분, 어느 길로 걸었는지 물었다. 프리미티보 길을 걸었다고 했더니, 본인은 프랑스길을 걸었는데 어제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외국 친구가 그녀에게 “넌 꽃길만 걸었구나. 난 프리미티보 길로 걸었는데 비바람에 완전 장난 아니게 고생했다.”라고 말했단다. 꽃길만 걸었을리가! 35일 만에 이곳에 도착한 그녀는 또 얼마나 지치고 힘들었을까? 걸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마음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간의 지쳤던 몸을 쉬어 가기로 했다. 오렌세(Ourense)는 로마 시대부터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갈리시아의 도시이다. 미뇨강을 따라 무료와 유료 온천, 노천탕이 있다. 주르륵 비 내리는 날, 따뜻한 온천 물속에서 몸을 녹이니 노곤했던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간절히 바랐던 나의 꿈, 첫 산티아고의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치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꿈은 이루어진다.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첫날 오비에도에 시작된 발자국부터 비바람 속을 뚫고 걸었던 모든 시간이 꿈만 같았다.
그 길 위에서 모든 걸 잊고 무작정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머릿속은 비워지고 단순해졌다. 배가 고프면 채우고 힘들면 쉬어 가면 되었다. 그렇게 걸어 대성당에 도착하면 끝날 것 같았는데 나도 모르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 돌아가 가족들과 얘기해야겠다.’
여러 가지의 루트로 펼쳐져 있는 길을 다 경험하고 싶다고 말이다. 아이들과 나의 시곗바늘 속도가 다르니, 체력이 허락하는 한 매년 산티아고를 걸으며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말이다. 지친 마음을 다독이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며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지혜롭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