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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May 09. 2024

길의 끝, 다른 시작

Day 13 아르수아에서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44km–60,767걸음

 조가비가 주는 상징적 의미는 여러 설이 있다. 하나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당한 야고보의 시신을 수습해 배에 띄워 보냈는데, 이 배가 이베리아반도까지 무사히 떠내려왔고, 가리비가 시신에 잔뜩 붙어서 시신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하나는 야고보의 시신이 파도에 좌초되기 일보 직전 지나던 결혼식 행렬이 이를 보게 되었다. 신랑이 말을 타고 달려와 애를 썼지만, 파도에 휩쓸리고 말았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니 파도는 잠잠해졌고 배도 무사히 해변에 안착했다. 신랑과 말이 무사히 바다에서 빠져나왔을 때 가리비로 뒤덮여 있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이렇듯 가리비는 야고보의 상징이 되었다. 순례자들도 조가비의 전설을 가방에 달고 걷는다.

 야고보의 유해가 도착한 곳은 갈리시아 지방이었다. 토착민들의 지배자였던 루파와 제자들은 야고보의 유해를 모셔 안장하였다. 또한 갖가지 이적을 통해 로마인들과 토착민들을 개종하는 데 힘을 쏟았다고도 전해졌다.

 세월이 흘러 8세기경, 밤하늘의 별빛이 구릉지의 들판을 맴돌며 춤추는 것을 목격한 주민들로 인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성지다. 야고보의 시신을 발견한 사람이 신의 계시를 받고 별빛이 비치는 들판을 따라 걸었기 때문에 ‘별빛 들판의 성 야고보’로 불리게 된 것이다. 

 11월 1일, 오늘은 순례길의 마지막 조가비 표시석을 만나는 날이다. 벽에 매달린 화분 속 제라늄은 녹아내려 가지만 앙상했고, 장대처럼 곧은 나무에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다. 1시간 남짓 걸어 칼사다(Calzada)에서 만난 바르에 눈길이 닿자마자 단숨에 들어갔다. 벌써 많은 순례자가 커피를 나누고 있었다. 작은 공간에 아기자기 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소품들, 요리조리 보는 재미로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게 눈 감추듯 쓱싹 해치우는 식욕이 고장 난 걸까? 커피가 다 식은 후에야 알아차렸다. 이 길에서, 마지막 아침 식사라는 걸.

 표시석 줄어드는 숫자에 즐거웠던 날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트레킹화의 얼룩도 말해주었다. 시시때때로 비가 내려 질퍽한 흙길을 걸었던 날이 더 많았다고. 몸은 무겁고 고된 날의 연속이었지만 힘들지 않았다고, 신발은 얼룩투성이었지만 나만의 시간으로 채워진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맑았다. 

 마을 담벼락에 노란 수국이 곱게 피었다. 조금만 건조하면 바로 말라버리지만, 물을 가득 주면 다시 살아난다. 시들지 않고 변덕을 부리는 수국은 ‘진심’과 ‘변덕’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다. 적합한 환경이라면 오랜 시간 피어 있는 수국을 이곳에서도 심심찮게 보았다.

파란 하늘이 나왔다가도 금세 장대비가 쏟아지는 변덕스러운 날씨가 오늘따라 내 마음을 더 울렁거리게 했다. 콸콸 빗물이 흘러내리는 오르막 흙길에서도 앞서가는 순례자들의 발걸음들은 바쁘게 느껴졌다. 내 걸음은 그 발걸음을 쫓기가 버거운지 마음이 무거운지 알 수 없는 느림보다. 나의 진심은 뭘까?

 


내리는 비를 맞아 무거워진 다리를 재촉하다 보니 다시 맑아진 하늘 아래다. 산티아고지방에 들어왔음을 알리는 돌이끼 가득한 비석과 마주했다. 기다란 지팡이에 달린 조개와 표주박과 더불어 SANTIAGO라고 새겨져 있다. 산티아고는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성 야고보를 라틴어로 ‘상투스 이아쿠부스(Santo Iacobus)’라고 부르는데, 그가 묻힌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의 언어로는 이아쿠부스(Iacobus)에서 유래한 ‘이아고(Iago)’라 했으며, 앞에 성인을 뜻하는 ‘산토(Santo)’가 붙으면서 ‘산토 이아고(Santo Iago)’ 이것이 변해 산티아고(Santiago)가 되었다.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는 스페인 갈리시아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그곳을 향해 가는 순례길 위에 나는 서 있고, 이제 그 길의 끝이 보였다. 순례길의 상징인 가리비와 노란 화살표를 따라 13일 동안 320km 하루도 쉬지 않고 온전히 나의 두 발로 걸어왔다. 

 신통방통하게 발에 물집 하나 잡히지 않고 큰 어려움 없이 비 내리는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표시석은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고, 바닥의 조가비 문양을 따라 대성당에 도착했다. 이 기분은 뭘까? 해냈다는 기쁨도,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도 아니었다. 마냥 좋기만 할 줄 알았던 종착지에 오고 나니 ‘이제 끝이구나.’ 하는 시원섭섭한 마음이 가득했다. 나의 큰 쉼표가 이제 끝나는구나. 그래 참 잘했다. 내 안의 너에게 잘했다고 쓰담쓰담하며 지치고 허기진 마음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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