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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24. 2024

줄어드는 숫자

(Day 11 루고에서 오카르바얄 27km–37,224걸음)


 10월 30일. 

 튼튼한 돌다리 폰테로마나(Ponte Romana) 아래로 미뉴강의 태양이 흘렀다. 무엇 하나 걸치지 않은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걸음도 가벼웠다. 맑은 날의 루고가 저 멀리 보일 때까지 안녕을 몇 번이나 나누었다. 표시석의 숫자가 세 자리에서 두 자리로 바뀌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안도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산라사로(San Lazaro)를 지나 아스팔트 길을 벗어났다. 오솔길로 들어서니 가을이 익어가고 있었다. 밭에 널린 주황색 호박과 쭉쭉 뻗은 수수를 보니 내가 익히 아는 시골 풍경과 닮아 푸근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날씨 때문에 출발이 늦어져 계획했던 일정이 뒤죽박죽 되었다. 그래도 꾀부리지 않고 충실하게 걸었다. 장시간 걷다 보니 다리의 근육들이 말을 걸었다. ‘어때? 오늘은 좀 괜찮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에 또 다른 근육들이 대답했다. ‘너 정말 잘하고 있어.’라고 말이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과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는 비, 이젠 적응될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오르막길에서는 숨이 턱턱 차올랐다. 점심도 먹지 못한 채 무상무념으로 7시간 걸어  폰테페레이라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알베르게 옆 식당으로 갔다. 반가운 얼굴들, 마리아와 콰다가 함께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감자와 달걀을 넣어 구워진 토르티야 한 판과 상큼한 샐러드, 고단함을 달래줄 하우스 와인 한 병을 주문하고 합석했다. 아직 식사 시간이 아니었기에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와인을 마시니 달큼하게 취기가 올랐다. 

흥 오른 기분을 놓칠 수 없지. 핸드폰의 음악 창고를 열어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불렀다. 제이콥과 마리아는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며 내 기분을 맞춰 주었다. 콰다도 신이 났는지 같이 몸을 흔들어댔다.

 숙소에 들어와 샤워를 마치고 발목을 보니 ‘이대로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퉁퉁 부었다. 희한하게도 아프지는 않아서 일단 걱정은 한쪽으로 밀어 넣었다.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남은 거리는 73km. 이틀 안에 끝내고 산티아고에서 휴식 시간을 만들어 보자는 제이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몸이 잘 걸어줄까? 의심하지 않고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 동안 최소 하루 35km 이상 걸어야 했다. 몸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 배낭은 물품 이동 서비스(동키)로 붙였다. 비 소식도 마음에 걸렸지만 목표 거리를 걸으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일의 목적지 아르수아(Arzua)의 숙소를 검색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마리아도 며칠 전부터 배낭 이동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마리아의 도움을 받아 배낭을 접수시키고 일찍 잠을 청했다. 

 온전히 나의 두 다리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여정 속에서 끝자락이 보이는 시간과 마주하니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돌아가면, 바쁜 시간 속에 갇힐 지금의 시간이 많이 그리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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