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발라르데카스에서 루고 16km–22,316걸음)
10월 30일, 일찍 눈이 떠졌다. 남편의 카톡을 확인했다. ‘사랑해요’라고 속삭이는 긴 문장이었다. 남편에게 암이라는 녀석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애틋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사랑은 아마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단어, 사랑이었다. 조용히 감싸주고 보듬어 주고 가슴으로 포근하게 안아 주는 나의 사랑을 기도하는 아침이었다.
구름 낀 하늘, 준비를 마치고 알베르게 곳곳을 카메라에 눌러 담느라 오늘도 꼴찌 출발을 면치 못했다. 밤사이 내린 빗물로 촉촉하게 젖은 길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오니 가을이 더 깊게 물들었다. 로메안 강을 건너면 마을 곤다르(Gondar)다. 오늘의 목적지 루고(Lugo)에 도착하면 100km의 여정밖에 남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날씨 때문이라도 선택해야 했다. 일정을 서둘러 마무리할지, 천천히 가야 할지 아쉬운 고민이 스치는 하루였다.
길 위에서는 마음에도 바람이 스멀스멀 불었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매년 이곳에 오고 싶은 욕심이 살랑거렸다. 다리의 근육들도 말을 걸었다.
‘너 정말 열심히 잘 살았고, 충분히 욕심내도 돼.’
마치 응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다리가 아프고 몸도 지쳐 쉽지 않은 일정이지만 눈뜨면 걷고 있는 내가 대견했고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도 신기했다.
차도를 건너, 숲길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개울을 하나 지나니 아스카사스다비냐(As Casas da Vina)의 넓고 편한 흙길이 펼쳐졌다. 그렇게 표시석을 따라 카스텔로(Castelo)에 도착했다. 흐르는 미뇨강 위로 로마 시대에 건축한 거대한 아치형의 웅장한 다리가 우리를 맞았다. 드디어 루고 입성이었다.
루고는 로마 시대에 쌓은 거대한 성벽이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다. 200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에 등재된 성곽 외에도 볼거리가 가득해 순례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하루를 온전히 머물곤 한다. 고픈 배를 채워야 장엄한 모습도 눈에 들어올 것 같아 짐을 풀고 허기를 달래러 나갔다.
가게에서 만난 여자 직원이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BTS 팬이라며 내게 환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싱글벙글 웃어 보이는 그녀의 따뜻함에 나도 싱긋 화답했다.
루고는 미노, 라토, 찬카 3개 강에 둘러싸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갈리시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다. 루고는 로마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에서 유래된 ‘성스러운 숲’이라는 뜻이다. 3세기 로마 제국은 성스러운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길이 2km가 넘는 성벽을 둘렀다. 원래는 80개가 넘는 반원형 탑이 있었지만, 이중 보존된 것은 71개다. 벽의 높이는 10~15미터, 두께는 4미터가 넘고 7미터가 되는 것도 있다. 성벽에는 현재 10개의 문이 있다. 중세 시대 루고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처럼 순례자의 중심지였다.
성벽 위를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았다.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조깅하는 사람, 반려견과 함께 천천히 산책을 즐기는 사람, 루고의 성벽을 즐기는 사람들로 넘쳤다.
루고 산타마리아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산타마리아 대성당은 교황의 특전을 가지고 있어 24시간 내내 성찬식이 진행되는 성체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12세기에 짓기 시작한 성당은 여러 부속 건물이 지어지면서 로마네스크, 도딕,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었다. 대성당 안을 들어가니 거대한 천정화가 시선을 압도한다. 18세기 아스토르가 출신의 미술가 호세 데 테란이 그렸고, 21세기에 바로크 양식 회화로 복원되었다.
저녁 미사를 위해 앉았는데 반가운 얼굴 마리아가 보였다. 며칠 만에 재회한 그녀는 무척 피곤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기도하고 있었다. 나도 두 눈을 감았다. 파이프 오르간의 웅장하고 깊은 소리가 성당 안을 가득 채웠다. 괜히 숙연해져서 마음속 깊은 소망을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이 길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성당을 나와 마요르 광장에서 콰다를 만났다. 이 길에서 제일 행복한 일은 약속하지 않아도 이렇게 다시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다.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서로의 안부를 살뜰히 물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따뜻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