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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02. 2024

그날의 오르막길

(Day 7 폰사그라다에서 오카다보 26km–36,606걸음)


 10월 28일, 왼쪽 발목이 코끼리 다리처럼 퉁퉁 부어올랐다. 4년 전, 계단에서 다리를 헛디뎌 골절되었던 발목에 무리가 왔다. 주위에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통증을 이긴 건지, 다행히도 욱신거리거나 아프지는 않았다. 저녁 맛있게 먹었다며 호세루이스가 건넨 달콤한 핑크 도넛과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대신하고 출발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덜 마른 꿉꿉한 트레킹화를 신고 길을 나섰다. 보름달처럼 부은 얼굴에 닿는 쌀쌀한 공기마저 푸근하게 다가오는 출발이었다.

 걷기 시작하면 어깨와 허리로 멘 배낭 무게 때문에 뜨끈한 열기가 금세 올라 땀이 주르륵 흘렀다. 폰사그라다를 벗어나 숲길로 향했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해가 나오는 것 같더니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갈리시아 지방의 날씨는 여자의 마음과 같다더니 변덕스러운 날씨를 제대로 만났다. 바람에 맞서, 지지 말아야지 하며 온몸에 힘을 실었다. 잠시 비를 피하려 오르막길 끝 작은 예배당에서 숨 고르기 하며 쉬었다.

 오늘도 어김없다. 2시간 걸었을까, 내 뱃속은 밥 내놓으라고 아우성쳤다. 바르를 찾아 다시 걷기 시작했고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하늘이 빼꼼히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참 모를 날씨였다.

차도를 지나 빌라르동고(Vilardongo)까지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 저 멀리 긴 테이블에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 계셨다. 편안하게 샌들을 신고 가방도 가벼워 보여 동네 분이신가 생각했다가, 의자에 누워 있는 스틱을 보고서야 순례자임을 눈치챘다.

 “홀라!”

 인사만 건네고 지나치려는 찰나, 할아버지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어디서 왔냐고 물으셨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할아버지는 이탈리에서 왔고 김민재 선수의 팬이라며 싱긋 웃어 보이셨다. 따뜻한 눈길로 경치를 보면서 슬로우 슬로우 걸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제발 시간아! 슬로우 슬로우 가주라.’

 하루하루 걷고 있는 이 시간이 좀 더 천천히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나 역시 바라고 또 바랐다. 아까부터 배가 고파서 ‘대체 바르는 언제쯤 나오는 거야.’ 속으로 울먹이고 있었는데, 비수기로 접어드는 계절이라 열렸어야 할 바르가 굳게 닫혀있었다. 파라다베야(Paradavella)까지 무려 12km를 시원한 클라라(레몬맥주)를 마실 생각으로 신나게 걸어왔는데, 배가 어찌나 고프고 목도 마른 지 그만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낭에서 아침에 먹고 넣어둔 핑크 도넛과 물을 꺼내어 허기진 배를 달랬다. 소처럼 되새김질할 수 있다면 두 배, 세 배로 먹을 텐데 들어가는 양은 딱 거기까지였다. 걷기 시작하고 두 시간 지나면 어김없이 배고파 오는 나의 왕성한 소화력의 한계였다.

 갑작스럽게 다시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댔다.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우의를 입었다 벗었다 반복했더니 체력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대체 얼마나 이 오르막길은 얼마나 올라야 끝나는 걸까? 점점 숨은 가빠지고, 허리케인처럼 불어대는 바람에 몸을 가누기 힘들어 비틀거렸다. 굵고 세찬 비바람에 양말을 타고 흘러내린 빗물이 트레킹화를 흠뻑 적셨다. 스패츠를 안 챙긴 나를 원망하며 누군가 프리미티보 길을 걷는다면 스패츠를 첫 번째 준비물로 챙기라고 꼭 일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축축해진 신발 때문에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이놈의 가파른 오르막,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수밖에! 나는 탈탈 털린 멘털을 부여잡고 걸었다. 내가 선택한 이 길은 어떻게든 걸어 내야 하는 길이기에 앞만 보고 전진했다. 저 멀리 드디어 바르가 보인다. 급한 볼일을 해결하고 클라라 한잔을 시원하게 원샷, 라테를 추가하니 인심 좋은 주인장의 따바스가 서비스로 따라 나왔다. 배가 부르니 고단함은 가벼워졌다.

 오늘의 종착지인 오 카다보(O Cadavo)에 도착하자마자 알베르게에 세탁실부터 살폈다. 신발을 말릴 히팅기가 있어 얼마나 반가웠던지, 무거운 배낭은 내동댕이치고 신발부터 벗어 히팅기에 한 짝씩 꽂아 두었다. 내일 아침이면 보송보송해질 신발을 상상하니, 이게 뭐라고 배시시 웃음부터 새어 나왔다.

 샤워부터 하고 저녁을 해결하러 마을 식당을 찾아 나섰다. 8시가 되어야 식사 주문이 가능한 스페인에서 나의 배꼽시계는 기다림에 지쳐 클라라를 불렀다. 클라라 한잔과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했다. 식당 앞 마트에 들러 간식을 쓸어 담아 숙소로 왔다. 늦게 도착한 조셉과 호세루이스가 저녁을 먹고 있는 테이블에 합석해 서로의 눈을 맞추었다. 하루가 빗물과 함께 가라앉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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