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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Mar 26. 2024

행복하게 이 길을 지나는 방법

(Day 6 그란다스데살리메에서 폰사그라다 20km–32,034걸음)

 10월 27일,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그칠 줄 모르고 비 내리는 아침, 빗소리 알람에 눈을 떠 창문을 열고 마을을 둘러보았다. 평화로운 풍경 속에서 외로움이 밀려왔다. 식구들이 보고 싶어 핸드폰을 집어 들어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퉁퉁 부은 나의 얼굴을 보며 발에 물집은 안 잡혔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컨디션은 괜찮은지 식구들은 안부를 퍼부었다. 괜찮다고, 밥도 잘 먹고 생각보다 잘 걷고 있다고 밝은 목소리와 환한 웃음으로 안심시켰다. 따스한 가족의 온기를 랜선으로라도 느끼니 행복해졌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어제 했던 족욕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건지, 아니면 이제 산티아고 길에 적응되어 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결 가벼워진 컨디션 덕분에 상쾌한 출발이다. 항상 한 발치 먼저 걷고 있는 제이콥의 뒤를 따른다. 산티아고가 4번째인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힘차 보인다.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세찬 바람이 분다. 비 개인 맑은 하늘과 햇살을 기대하며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숲길로 향했다. 아 파라파(A Farpa) 마을에서 도로를 지나 세례이셰이라(Cereixeira)를 벗어나자 다시 구불구불한 숲길이었다. 목장길이 푸르게 펼쳐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대지와 하늘이 맞닿아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조금씩 흩어지더니 청명한 푸른 하늘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 만에 만나는 반가운 햇살 덕분에 발걸음이 더욱 경쾌해졌다. 뭉게구름 속에 저만치 앞서가는 제이콥은 소와 다정한 대화라도 나누는 걸까? 그 풍경을 담아 따스한 사진 한 장 남겼다. 눈이 부신 햇살 속에서 나는 선글라스 꺼내어 쓰고 햇볕을 마음껏 즐겼다. 힘들었던 어제와 그제의 길에 비하면 오늘은 여유로웠다. 카스트로(Castro)를 지나 헤스토셀로(Gestoselo)였다. 이곳부터 갈리시아로 넘어갈 때까지 오르막이지만 힘에 부치지 않는 걸 보니 이제 마음의 근육까지 단단하게 붙은 거 같다.

 즐거운 마음으로 걸었다. 길 위에 나타난 G – A 누군가 돌멩이로 나란히 줄 맞추어 경계선 표시까지 해둔 걸 보니 이곳은 페냐폰테(Panafonte) 임에 틀림없었다. G는 갈리시아(Galicia)를, A는 아스투리아(Asturia)를 의미한다. 얼마 지나 내 눈에 나타난 표시석에는 갈리시아가 적혀 있고, 남은 거리는 166km였다. 이제 걸어온 만큼 나아가면 이 길이 마무리된다는 뜻이었다. ‘벌써 반이나 왔다고?’ 아쉬운 마음이 잠시 물결쳤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은 어떤 재미난 이야기들로 채워질지 기대하며, 지금, 이 순간 최대한 평온하고 행복하고 싶었다.


 어제저녁 예약해 둔 숙소에 먼저 도착한 호르케 부부가 수고했다며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뒤이어 조셉, 호세루이스, 마지막 콰다까지 입실을 마쳤다. 서로가 피곤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수고했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부가 추천해 준 알베르게는 역시 깔끔하고 쾌적하며 모자람이 없었다. 너른 주방을 보니 요리부심이 불타올라 제이콥에게 저녁 준비를 제안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숙소 앞 마트로 향했다. 과일 코너에서 잘 익은 말랑말랑한 아보카도와 키위, 토마토를 골라 담고, 신선한 샐러드 야채를 집어 들었다. 토마토 파스타와, 까르보나라를 해볼 참이다. 완벽하게 할 순 없겠지만 무난한 재료들을 골라 담고 레드 와인을 한 병 골랐다. 어떤 술이든 레몬 탄산수를 넣어 마시는 조셉을 위해 레몬 탄산수도 큰 병으로 담았다. 마무리 입가심 디저트로 먹을 달달한 초코 아이스크림까지 담으니, 어린아이처럼 신났다. 며칠 비 맞고 고생한 친구들의 입을 즐겁게 해 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두 팔을 걷어붙였다. 우선 샐러드 야채를 손질해 깨끗하게 씻고 과일은 한입에 쏙쏙 먹기 편하도록 잘라두었다. 파스타 면은 알단테로 삶고, 팬에 베이컨을 바싹 익힌 다음 우유와 생크림을 동량으로 넣어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고 중불에 소스를 끓이고, 다른 팬에는 토마토소스를 부어 한소끔 끓여 놓았다. 큰 접시에 샐러드를 먼저 담고 썰어둔 토마토, 아보카도, 키위를 보기 좋게 플레이팅 하여 올리브유와 냉장고에 있는 꿀을 한 바퀴 둘러준 다음 발사믹 글레이즈는 지그재그로 뿌려주었다. 샐러드 두 접시가 금방 만들어졌다. 준비된 소스에 파스타 면을 반씩 담아서 팬을 돌리기 시작했다. 물론 속으로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주문을 백번도 넘게 외쳐대면서 말이다. 그사이 제이콥은 테이블 세팅을 마치고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제법 그럴싸한 저녁이 차려졌다.

 “와우! 어메이징!”

들어오면서부터 시끌벅적 요란한 콰다와 호세루이스, 조셉은 신나 했다. 미소만 봐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호르케 부부도 나의 등을 어루만지며 볼 키스로 고마움을 전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눈으로 가슴으로 나누는 대화가 더 깊어지는 시간이다. 짧은 영어와 구글 앱, 온갖 몸짓 언어로 우리의 대화가 깊어지고 나의 행복 무게가 무겁게 살찌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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