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 Mar 19. 2024

비바람 뚫고 하이킹

(Day 5 베르두세도에서 그란다스데살리매, 27km–38,365걸음)

 10월 26일, 밤새 내리던 빗줄기가 더 세차게 떨어진다. 굵은 빗소리가 야속한 캄캄한 아침이었다. 로사는 누워있는 내게 와 얼굴을 매만지며 “배는 좀 괜찮아?” 물어왔다.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소식은 없다. 다들 출발 준비로 분주한데 난 소파에 앉아 사과 한 입 먼저 베어 물었다. 

오늘도 첫출발은 준비를 꼼꼼하게 마친 호르케 부부였다. 뒤이어 호세루이스도 길을 나섰다. 창밖을 바라보던 나는 도저히 저 비를 뚫기 힘들겠다며 뭉그적거렸다. 조셉과 콰다 역시 내 편이 되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제이콥은 배 좀 채우고 고민하자며 나를 토닥였다. 

나란히 우산을 쓰고 슬리퍼 신고 고인 물구덩이에 물장난까지 치며 숙소 아래의 마트로 신나게 걸었다. 물고기자리 베스트 메뉴인 가리비 봉골레를 해 볼 참이었다. 냉동 가리비와 마늘, 파스타 면을 사 들고 온 사이, 마음이 변한 콰다가 출발했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파스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늘 두 통을 까서 반은 다지고 반은 편을 썰었다. 파스타 면은 식감 좋게 알단테로 삶았다. 냉동 가리비 관자는 한입에 넣기 어려워 4등분 했다. 편 마늘을 넣은 팬 위로 올리브 오일을 충분히 둘러주었다. 알싸한 향이 적당히 오르고 마늘 색이 노랗게 변하기 시작하면 다진 마늘을 넣어 같이 볶는다. 관자를 넣어 반쯤 익으면 삶은 파스타 면을 넣고 면수를 한 국자 더한다.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냉장고 누군가 두고 간 절임 고추를 곱게 다져 매운맛을 추가시켰다. 센 불이 아니라 불맛을 낼 수 없어 아쉬웠지만, 배고팠던 조셉과 제이콥은 엄지 척하며 포크로 돌돌 말아 맛있게 한 접시 싹싹 비우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배가 부르니 비를 뚫을 용기가 생겼다. 다른 친구들보다 두 시간 늦은 출발이었지만 부른 배 덕분인지 여유로운 에너지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주었다. 

‘나가면 바로 신발부터 젖을 거야. 받아들이고 즐겁게 걷자.’ 

내리는 비를 친구 삼아 걷기로 했다. 콰다는 마을 하나를 지나 자리한 라메사(La mesa) 공립 알베르게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출발을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우리 셋은 커피를 포기하고 마을을 벗어나 만난 오르락내리락 숲길까지 계속 걸었다. 오르막의 끝자락에는 넓적한 돌을 층층이 쌓아 지은 산타미라나부스폴 예배당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세찬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이 자리를 지켜 온 예배당은 운무와 함께 어우러진 대자연의 일부 같았다. 비와 함께 걷는 길이 힘들지만, 마냥 힘들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사진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멋진 풍광들이 힘든 시간을 보상해 주기 때문은 아닐까. 

협곡을 따라 걷다가 먼저 출발했던 호르케 부부와 호세루이스를 드디어 만났다. 오후 세 시 첫 커피타임이다. 아침에 파스타를 맛있게 먹었다며 조셉이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겠단다. 사양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고소하고 진한 에스프레소의 맛을 음미하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커피 향에 빠져 있는데 콰다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를 보자마자 콰다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너희들 택시 타고 왔지?” 물으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한바탕 웃음 소동이 펼쳐졌다. “너 아까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 마시는 거 봤어.” 조셉이 일침을 날렸다. 콰다는 우리가 비 핑계로 알베르게에 머물며 오늘 일정을 소화 못 할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보다 일찍 도착해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우리를 보니 의아해할 만도 했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그린다스데살리메에 도착했다. 알베르게가 한 곳뿐인데 호스피텔러(매니저)의 부친상으로 문이 닫혀있었다. 숙소를 검색해 보니 다행히 근처에 호텔이 있었다. 종일 비를 맞고 걸어 신발까지 젖었으니 하루쯤 좋은 숙소에서 몸을 쉬게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함께 체크인을 마치고 트레킹화를 벗어던졌다. 울 양말을 훌러덩 벗으니, 발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종일 빗물이 들어 퉁퉁 불어 터진 못생긴 나의 두 발, 물집 하나 잡히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안도에 한숨을 쉬었다. 울 양말과 발목을 잘 잡아주고 쿠션 좋은 신발 덕에 5일째 일정도 무탈하게 마무리했다. 젖은 옷가지와 어제 못 돌린 빨래부터 해결했다. 방에 들어가 화장실 문을 열어보니 족욕은 충분히 하고 남을만한 깜찍한 욕탕이 있었다. 

따뜻한 물을 받았다. 친구 하진이 챙겨 준 에센셜 오일 키트를 열어 부종에 좋다는 사이프레스 오일과 오렌지 오일을 서너 방울 톡톡 떨어뜨렸다. 온종일 비 맞고 걸은 나에게 보상이라도 하듯 발을 담그고 혼자만의 감상에 흠뻑 빠져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호르케 원정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