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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11. 2024

햇살이 주는 눈물

(Day 8  오카다보에서 발라르데카스  15km–22,316걸음)

 10월 29일 밤새도록 퍼붓던 비는 아침까지 계속 내렸다. 어제 마트에서 담아 온 컵 면과 냉동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주스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대체 언제까지 내릴 거니?’ 

 속으로 투덜거리는 내가 어린아이 같아 싱거운 웃음이 났다. 동행하는 이에게 조급한 마음이 들킬까 애써 웃는 낯으로 아침을 먹었다. 그사이 친구들은 하나, 둘 숙소를 빠져나갔다. 보송하게 마른 신발이 다시 젖지 않게 따스한 볕을 기다리며 느릿느릿 준비를 마쳤다. 친구들을 다 먼저 보낸 늦은 출발, 나의 바람대로 비가 그쳤다. 

 감사한 마음으로 알베르게를 나왔다. 오카다보를 벗어나 표시석을 따라 걷기 시작하는데 어디선가 등장한 강아지 한 마리가 내 뒤를 졸졸 쫓았다. 어디까지 따라오려는 심산인지 녀석은 차도를 건너 겁도 없이 뒤따라 붙었다. 갑자기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달려왔다. 젊은 남자가 붉으락푸르락하며 트럭에서 내렸다. 강아지 목줄을 잡아채 강제로 차에 태우며 우리를 째려보더니 담배를 물고 쌩하니 가버렸다. 따라온 강아지를 우리가 꼬드긴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해졌다. 

 우리는 쿨하게 “잘 가라!” 인사를 던지고 부는 바람에 언짢은 기분을 날려버렸다. 쭉쭉 뻗은 소나무가 뿜어내는 향기를 맡으며 흙길을 따라 바케리사(Vaqueriza) 고개를 지났다. 고개를 넘어 시원한 바람과 함께 도착한 작은 마을 빌라바데(Vilabade)에는 스페인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있는 산타마리아 교회가 있다. 고딕 양식의 15세기 건축물답게 외관은 오래된 흔적들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고딕’이라는 말은 ‘고트적’이란 뜻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가들이 그들 이전의 미술을 야만적이라고 멸시하며 부른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5개의 아치 기둥과 피사드는 바로크양식과 신고전주의 요소가 어울려 이국적인 형상을 자아낸다.

성당을 지나니 제법 큰 마을 카스트로베르데(Castroverde)이다. 

 2시간 넘게 걸어 만난 눈앞 바르가 반갑다. 시원한 맥주로 목을 축이고, 진한 에스프레소와 따바스로 고픈 배를 눌러 주었다.      


바람의 시간 속에서


 화사하게 비추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의 시간 안에서 나는 고된 시간을 보내온 나와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동안 힘들었지? 가정을 지켜내느라 보내온 시간 애 많이 썼어. 힘들 때마다 울지 않고 잘 버텨줘서 고마워.’ 

 흐르는 눈물도 참지 않았다. 울음보가 터져 얼마나 걸었을까. 

 산미겔도카미뇨(San Miguel do Camino)를 지나는 길 위에서 기영에게 카톡이 왔다. 아픈 곳은 없는지 살뜰하게 물어주는 기영이는 가톨릭 신자다. 세월의 흔적 가득 한 순례길의 돌 십자가 사진을 찍어 보냈다. 행복한 시간 가득 채우고 오라는 따스한 답장에 다시 힘내어 웃을 수 있었다. 

 어느덧 200km를 넘게 걸었다. 일정을 마치고 일찍 도착한 빌라르데카스(Vilar de Cas) 마을 초입에 있는 숙소는 그동안 거쳐왔던 알베르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돌담 안으로 숙소가 있고, 맞은편에 마구간을 개조한 듯한 바르는 시골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겨움과 편안함을 주었다. 이미 도착해 와인을 나누고 있는 조셉과 호세루이스를 만났다. 나도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아 주인장이 사발에 내주는 웰컴 드링크,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향기와 묵직함에 반해버려 한 잔만 더, 한 잔만 더, 그러다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야 짐을 풀었다. 알베르게에서 준비해 준 따뜻한 수프와 빵 그리고 뭉글하게 읽힌 고기찜까지 먹고 나니 배가 빵빵해졌다. 친구들과의 수다가 그치지 않는 밤, 눈꺼풀 위로 졸음이 가득 쏟아졌다. 자리를 슬쩍 피해 먼저 밖으로 나왔다. 

 푸른 잎이 노란색으로 물들어 가는 가을이 오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피아노가 있다면 연주하려고 연습했던 ‘10월에 어느 멋진 날에’를 들었다. 항상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의 시간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일하는 날에도, 이유 없이 힘든 날에도, 화나는 마음도 이쁘게 표현하는 내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참고 버티고 보냈던 시간을 위로하는 이 길이 너무 소중하다. 내게 이런 여유를 내어준 가족들에게 한없이 감사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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