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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30. 2024

나의 너에게, 너의 내일에게

(Day 12 오 카르바얄에서 아르수아 38km–52,197걸음)

10월 31일

 지금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미소가 커피 향보다 깊고 향기롭다. 딱딱한 빵도 즐겁게 씹어 넘긴다. 집에서는 눈뜨기 무섭게 무언가 시작해야 하지만, 이곳에서는 휴식처럼 시간이 흐른다. 먹고 자고 비우고 내 몸뚱이 하나만 챙기면 된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

이제 남은  하루도 너끈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에게 최면을 걸어본다. 마음이 아닌 행동으로 걸어야 한다. 이제 정말 여정의 끝자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등에 지고 있던 봇짐 하나가 나에게 그렇게 큰 무게였을까? 아침을 시작하는 발걸음이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이제 남은 걸음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울 것이다. 가족들도 물고기자리도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일들은 모두 지우고,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자유롭게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알베르게 담장 아래에는 애플민트가 가득했다.

‘원산지가 유럽이었으니 이곳이 너의 고향이겠구나.’

따뜻한 봄이 오면 땅속을 비집고 올라오는 애플민트는 물고기자리에서도 효자 식물이다. 여름 음료 위에 한두 잎 얹어주면 눈 속까지 청량해지는 비주얼 담당 식물, 콕콕 빻아 레몬과 토닉워터를 넣어주면 푸른 맛 모히또로 변신한다. 따뜻한 물에 서너 잎 넣어 마시면 피로 해소에도 효과가 있다. 어제 발견했으면 따뜻하게 한잔 마셨을 텐데, 떠나는 길의 만남이 못내 아쉬웠다. 애플민트의 윗가지를 잘라 심호흡 깊게 하며 코끝으로 향기를 밀어 넣었다. 멘톨 성분 때문인지 코가 뻥 하고 뚫리며 기분까지 좋아졌다. 그 옛날 수도원에서는 분명 피로를 덜어주는 약초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큰 쉼표하나 찍겠다고 이곳 스페인까지 날아왔다. 내일이면 이 길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이 더 크다. 길 위에서 얻는 고단함이 행복으로 둔갑하는 이유는 뭘까?

항상 바쁘게 보냈던 하루하루, 나보다는 가족이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원망이나 후회는 없다. 앞으로는 나를 온전히 보듬고 다독이면서 내게 기쁨이 되는 일도 잊지 않으려 한다.

선물 같은 하루를 이어가는 남편에게 말 한마디 살갑게 건네고,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물고기자리에 오는 손님들을 웃음으로 맞이하는 것, 그것이 나의 일이다. 가끔 여유가 되면 나만의 시간을 가지며 휴식하는 것, 그것이 내가 누릴 기쁨의 최선이다.

좋아하는 산에 가끔 오르기, 여름 바다에서 오리발 끼고 물속을 첨벙첨벙 헤엄치기,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올 수 있기를.

맑았던 파란 하늘에 구름이 밀려들더니 억수같이 비가 내렸다. 길 위로 자욱한 안개가 피어난다. 언제나 50m쯤 앞서 걷고 있는 제이콥은 무슨 생각을 할까? 매년 산티아고로 돌아오는 그의 마음이 문득 궁금해졌다.

심장 압박,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세상이 재미없고 희망도 꿈도 없던 어느 날, 제이콥은 입원실 모퉁이 TV에서 산티아고를 만났다.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시작된 순례길이었다. 인생의 나침반이 될 거란 기대나 희망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새로운 희망을 만나는 인생의 길로 바뀌었다고 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할까?’ 수없이 질문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희망이라고 했다.

멜리데(Melide)를 목전에 둔 프랑스 길과 프리미티보길이 합쳐지는 곳, 갑자기 길을 걷는 순례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혼자보다는 예닐곱 무리 지은 순례자들, 자전거로 순례길을 가고 있는 ‘비씨그리노’도 보였다. 스페인어로 자전거를 뜻하는 ‘비씨클레타(Bicicleta)’ 와 순례자를 뜻하는 ‘페르그리노(Peregrino)’를 합쳐 ‘비씨그리노(Bicigrino)’라고 부른다. 스치는 얼굴마다 ‘홀라’(Hola) 와 ‘부엔까미노’(Buen Camino), 인사를 나누었다.

‘부엔(Buen)’은 좋은, ‘까미노(Camino)’는 길을 뜻한다.

‘좋은 길 되세요.’

순례자의 안녕과 평안을 바라며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하길’이라는 속뜻도 품고 있을 것이다.

장대비를 뚫고 목적지인 아르수아(Arzua)에 도착했다. 5만 보를 넘게 걸었다. 이제 남은 거리 39km. 내일은 다리의 근육들이 놀라 더 아우성을 치겠지. 내일 고민은 내일, 오늘은 여기까지다. 억수 같은 비가 그칠 줄 모르는 10월의 마지막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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