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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r 05. 2021

영화<어 퍼펙트 데이>:

걷고 또 걸어라. 그러면 집에 당도하리라.

  <어 퍼펙트 데이>의 아이러니는 ‘퍼펙트’의 의미가 무색하게 영화 내내 반복되는 희망과 실패 그리고 낙담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어둡거나 절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시종 깔리는 펑크 록의 경쾌한 음악과 함께 주인공들이 실패에도 주저앉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가열차게 달리는 유쾌함이 시종 흐른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이 거의 끝나고 평화협정이 맺어지는 즈음, 발칸 반도 어느 시골 마을이 배경인 이 영화는 ‘평화’라는 공언 뒤에 숨은 제도적, 정치적 맹점을 웃음으로 전달하는 블랙 코미디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긍정적 비전은 전쟁의 고통 속에서도 모든 경계를 넘어 서로를 보듬는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가 평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에 있다. 이 영화에서 활약하는 인도주의 단체(NGO)에서 파견된 주인공들이 입은 옷이나 차에 새겨진 ‘Aid Across Boarder’가 함축하는 메시지이다.      


  영화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파괴되고 빈곤해 보이는 발칸 반도의 어느 작은 마을, 마을 주민들의 유일한 식수원인 우물에 빠진 시신을 건져내기 위해 밧줄을 구하려는 NGO 팀원들의 하루 동안의 좌충우돌 분투기이다. 일상적인 날들이라면 밧줄 구하기는 아주 쉽게 해결될 문제이다. 그러나 밧줄을 찾아가는 길에 잠복 된 지뢰의 위험과 이방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닫힌 마음 그리고 분쟁이 끝날 즈음에 더 이상의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주둔 유엔군의 경직된 규칙이나 제지로 인해 이 간단한 일은 꼬이고 지연된다.    

  

  이들의 밧줄 구하기를 방해하는 것은 우선 시신들이다. 마치 공기를 잔뜩 주입한 거대한 공기 인형처럼 육중한 우물 속의 시신은 누군가 우물을 오염시키기 위해 고의로 빠뜨린 것이다.(마을 소년 니콜라의 말에 의하면 주민들에게 비싸게 물을 팔아먹기 위해 물을 파는 상인들이 꾸민 일이라고 한다). 또한  밧줄을 구하려고 애쓰는 팀원들의 행보를 지체시키는 것은 길 위에 놓인 소의 사체이다. 이 사체 또한 누군가 소의 주위에 지뢰를 숨겨 놓은 함정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렇도록 힘든 밧줄 구하기는 지금까지 이웃들이었을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림을 당해 죽은 자들이 매달려 있는 밧줄에서 해결된다. 이념이나 종교적 차이로 인해 어제의 이웃이 오늘의 적으로 맞서는 슬픈 역사를 우리는 무수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죽은 자들은 그 차이를 가리지 않고 산 자들의 생명을 구할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이 주검은 바로 꼬마 니콜라의 부모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NGO 팀원들 중 리더격인 맘부르(베나치오 델 토로)가 구하고자 하는 것은 밧줄뿐만 아니라 니콜라에게 줄 축구공이다. 동네 거친 아이들에게 공을 빼앗겨 울상이 된 니콜라에게 맘부르가 다른 공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맘부르에게 마음을 열게 된 니콜라는 밧줄이 있는 곳을 안다며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곳에 밧줄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그 밧줄은 사나운 개를 묶어 놓은 것이라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지경이다. 언뜻 실리를 위해 개를 죽이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그들은 소시지에 안정제를 넣어 개에게 던진다. 당연히 개는 순식간에 미끼를 먹어치우지만 예상과는 달리 개의 사나움은 전혀 진정되지 않는다. 실망한 맘부르와 팀의 정의파 신참 소피(멜라니 티에리)가 집안 사정을 살피기 시작한다. 그러나 들어선 집은 온통 누군가의 공격에 의해 엉망으로 파괴되어 있고 부모가 타고 도망가려던 차는 여행 가방을 그대로 남겨둔 채 창고 흙먼지 속에 있다. 거실의 커다란 거울은 박살이 나서 니콜라 가족이 겪었을 극박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그 거울 앞에 남겨진 가족 사진은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가족’과 ‘집’의 상실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때 소피가 책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공을 꺼내는 사이 우연히 집 밖 마당을 내다본 맘부르가 공중에 매달려 죽어 있는 니콜라의 부모를 보게 된다. 니콜라에게는 이 사실을 알리지 않지만 결국 니콜라의 부모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밧줄은 우물의 시체를 건질 희망이 된다.      

  천신만고 끝에 밧줄을 구하고 돌아가는 하루 해가 기울어 가는 저녁, 서둘러 가는 길 위에 얼룩 소의 사체가 누워있다. 팀원들은 이 소를 갖다 놓은 누군가는 이전에 소를 정면으로 밟고 지나간 맘브르의 동료인 B(팀 로빈스)의 행동을 숙지했을 것이고, 더욱이 어둠 속에서는 소의 사체 어느 지점에 지뢰를 설치했을지를 알 수 없으니, 노상에서 밤을 지내게 된다. 그런데 엉킨 실타래는 의외로 쉽게 풀리게 된다. 날이 밝아오자 먼 산길 들판을 따라 소들을 몰고 가는 마을의 노파가 보인다. 이 여인은 어디 묻혀있을지 모르는 지뢰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들을 앞세우고 소가 가는 길을 따라간다. 이때 멀리 눈 덮인 산들과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 그리고  드넓게 펼쳐진 산악의 너른 평원들이 어우러지는 장면의 아름다움은 압권이다. 이를 본 대원들은 그 노파의 뒤를 따라 무탈하게 마을로 되돌아온다. 


  우물에 도착해 드디어 거구의 시세를 거의 끌어올렸을 즈음 그 지역을 관리하던 주둔군이 규칙을 들이대며 밧줄을 끊어버리자 시신은 다시 우물로 떨어진다. 평화는 표면적으로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만 실제 민간인들의 삶에 대한 고려는 안중에도 없는 차가운 평화에 불과하다. 반면 NGO의 팀원들은 서로 다른 입장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의 식수를 위해 규칙보다는 실제, 이념보다는 행동이 앞선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에 맞설 수 없는 팀원들은 우물을 포기해야 하고 8천여명의 난민이 있는 수용소의 화장실 배수 시설이 터져 난리통인 다른 마을로 도움을 주러 가야 한다는 연락을 받는다. 비만 안 오면 어떻게라도 그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을거라는 자조적인 말을 하자마자 그때 갑자기 세찬 소나기가 쏟아진다. 하늘도 그들을 돕지 않으니 완전한 실패의 날이 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로 인해 우물이 넘치자 자연스럽게 시체가 떠오르고 이 희소식을 소를 몰고 마을로 돌아온 노파가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자 마을은 기쁨에 넘친다. NGO 팀원들은 이 소식을 모른 채 다른 마을로 떠나겠지만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행운은 인간의 손을 떠난 자연의 우연이 선물한다. 그렇지만 감독(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이 말하고 싶은 것은 신화적 신비가 아니라 지상에 실제 남은 사람들의 삶이다. 세상 어느 곳에든 갈등과 전쟁은 반복되고 평화를 되찾는 ‘어 퍼펙트 데이’는 어쩌면 불가능한 꿈이리라. 그럼에도 우리가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을 돕고자’ 힘을 모으고 행동하는 연대의 힘이 전쟁으로 지치거나 허물어질 수 있는 이웃을 일으켜 세우고 살아 나아가게 한다.

      

  이 희망적 미래는 영화 종반부에 집약된다. 애써 찾아준 축구공을 니콜라가 마을 소년들에게 10불에 판 것을 알게 된 맘부르는 니콜라에게 실망을 하지만 니콜라에게 그 10불은 부모를 찾아갈 방법을 제공하는 사람에게 줄 돈이었음을 알게 된다. 50불이 필요한 그 거래에서 니콜라가 가진 것은 40불이니 10불이 모자랐던 것이다. 차마 니콜라에게 니콜라의 부모 죽음을 알릴 수 없었던 맘부르는 자신이 벨트 안에 작게 접어 숨겨 놓았던 100불을 꺼내 니콜라에게 준다. ‘부모를 찾아가되 꼭 할아버지와 함께 가라면서...’. 언제쯤은 니콜라도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겠지만 그 돈은 니콜라가 힘든 세상에서도 혼자 남은 것이 아니라는 위로를 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주제 하나가 ‘집’이다. 영화 초입, 소떼를 몰고 가는 노파에게 팀원들은 위험을 경고하지만 노파는 ‘난 집으로 가야한다’며 의연하게 집으로 향한다. 맘부르를 기다리는 여자 친구는 세상 어느 한 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는 무관한 듯 그가 돌아오면 함께 살게 될 집의 벽지 색깔을 맘부르에게 전화로 묻는다. 맘부르의 전 애인이었지만 현장 분석가로 파견된 카티야(올가 쿠릴렌코)는 NGO 팀원들을 무사하게 집으로 돌려 보내야 한다는 사명이 있고, 근거없이 낙천적이고 유머러스한 인물인 B는 돌아갈 집도, 기다리는 사람도 딱히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모두가 ‘집’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공감과 연대이다. 그러기에 맘부르는 다시 난민 원조를 위해 함께 가는 소피에게 말한다. “결국 집에 가게 될 거야”, “지금 일어나는 일에 집중해. 지금 이 순간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기에 '어 퍼펙트 데이'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매순간 '집'으로  나아가는 희망찬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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